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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로 인한 행동규제가 종식된 이후, 뉴질랜드 교민사회에 불어닥친 교육 현상의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저학년 학생들에 대한 교육 열풍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앞으로 어떤일이 또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발로이지는 않을까 싶어서 약간 착찹하긴 합니다만..
저의 경우에도 고학년 학생들의 학습 문의보다는 저학년 학생들에 대한 고민 상담과 학습 문의가 급격히 늘어나 이러한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4,5년 전만 해도 Y10이면 일러도 너무 이르다며 머지않아 공부에 목이 메이게 될 테니 그 전에 실컷 놀게하시라고 부모님의 조기교육 열정을 ‘만류(?)’하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엔 Y8,9 학생들 손을 잡고 학원에 상담차 내왕하시는 분들이 많아지셔서 그런 만류가 무색해졌습니다.
아직은 엄마가 무서워서 죽으라면 죽는 척이라도 할 나이의 아이들은 학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앞으로의 고생길을 짐작하겠다는 듯 한숨을 쉬고, 아이를 옆에 앉힌 어머님들은 칭찬과 아쉬움을 반반씩 섞어 그간의 ‘독학’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웠는지 하소연하시곤 하지요. 그리고 그 중에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은 아이가 머리는 되는데 도통 외우려들지를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맨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없다고 팬팬 놀기만 하는데 그럼 점수는 잘 나와야 할거 아녜요? 근데 점수는 맨날 그 자리예요.. 몇번 다그치기라도 하면 책을 봐도 이해가 잘 안 된다고 징징대고.. 그럼 달달 외우기라도 했어야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책을 다 외우면 정답이 나오게 되 있는데 그렇게 해보지도 않고 지가 무슨 공부를 했다고 볼멘 소리인지 참..”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부모님과 자녀간에 세대차이와 더불어 교육 시스템의 차이를 겪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곤합니다. 부모님께서 경험하신 사지선다 형식의, 그러니까 단순하게 암기한 내용을 끄집어내어 쏟아놓으면 되는 시험방식은 이제 그 종주국인 일본에서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정작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구요.
암기.
그렇습니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암기 또한 학습의 중요한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고 암기력이 좋은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는 명제도 당연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실행중인 유럽식 과학 교육에서는, 특히 물리와 화학 그리고 우주과학에서는 암기가 가지는 효과가 우리의 기대에 비해 미미하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흔히 물리는 공식을 다 외우고 화학은 주기율표를 다 외우고… 하는 식으로 무조건 암기, 입력 방식으로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기를 원하시는 부모님들을 뵐 수 있는데 현실을 말씀 드리자면 공식은 Formula sheet를 주기 때문에 외울 필요가 없고 주기율표 또한 당연히 제공되기에 암기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각종 상수들과 중요 정보까지 모두 제공되기 때문에 어떤 자료가 해당 문제를 푸는데 필요한 자료인지만 구분할 수 있다면 무언가를 달달 외워서 시험장에 들어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적어도 과학과목에 대해서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곧 머리터지는 고학년 공부에 들어설 아이들의 과학공부는 어떻게 준비시켜야 할까요?
유럽식 과학 공부의 핵심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분석과 예상입니다. 적어도 Y10까지는 그렇습니 다. 그러나 그 이후 ‘성적’에 대한 압박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지지요. 이젠 점수를 위한 공부를 해야만 할 시점이 되었고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해’와 ‘표현’으로 일단락 됩니다. 과학적 현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그리고 이해한 것을 이론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Y10까지 열심히 연마해 온 관찰, 분석, 예상의 기술들이 그 바탕이 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니 주니어 시기의 과학공부는 관찰한 현상을 분석하는 연습과 이후의 추세를 예상하는 훈련에 집중되어야 하며 이러한 활동들은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이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부모로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아이가 배우는 모든 과정을 다 공부해서 자세히 알려주고 인도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불안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봅니다. 사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부모님께서 경미한 (혹은 중증의) ‘영어장애’를 가지고 계시고 거기다가 생업이 바쁜 가운데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바랄 수 없겠지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하더라도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의 과학 학습 도울수 있는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아래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근본적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곳에서 나고 자랐어도 아이들은 이미 한국어로 엄마, 아빠를 배웠고 한국어의 어순에 영향을 받은 아이들입니다. 언어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개인이 사고하는 순서와 논리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우리 아이들의 사고 순서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어권의 “결과 먼저 이유 나중”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의 교육과정은 당연히 유럽인의 사고에 맞추어져 있으니 우리의 아이들은 뭔가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한 알 듯 모를 듯한 어색함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학교 과학교육에 있어 실험과 이론수업의 배치에 한국적 과정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요.. 이론 수업 중간 중간에 다음 챕터에 해당하는 실험을 병행하거나 한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아예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실험만 몇 번을 되풀이 한 후 이론 수업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험을 먼저하고 스스로의 가설을 세운 후 나중에 배우는 이론적인 부분과 맞춰 보라는 것인데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한국아이들은 실험에서 이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매우 취약합니다. 명민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아이들의 사고논리가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차이를 간과하고 아이만 다그치며 적성문제를 들먹인다면 어린시절의 아인슈타인에게 법대에 진학할 것을 종용하는 것과 같은 누를 범할 수도 있을 겁니다.
둘째. 상식을 키워야 합니다.
뉴질랜드 현지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아주 과격하게 놉니다. 던지고 부수고 처박히고.. 우리가 보기엔 방임과도 같은 부모의 애정(?)어린 관리속에서 아이들은 하고 싶은 대로 놀며 자라고, 좀 커서는 아빠가 취미 삼아 만지는 자동차, 목공기계, 운동장비.. 등등을 접하며 자연스레 체험적 공학상식을 쌓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환경적으로 실험에 강한 아이들로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물론 다 그런 것 아니지만, 대다수가 어려서부터 놀이방, 공부방에서 자랍니다. 당연히 실험적 환경에 노출될 기회가 적어지겠지요.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환경과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국인에게 아이들 교육을 위해 키위처럼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차선책은 가능하면 다양한 방면에서 상식을 쌓게 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비디오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검증된 자료를 반복해서 접하게 한다면 이를통해 쌓여진 상식이 분명히 컬리지 과학학습에서 빛을 보게 됩니다.
셋째. 논리적 서술 훈련을 해야 합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과학은 “왜?”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내는 학문이기에 현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면 과학은 이미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의 정체성은 학습 내용에도 이어져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전 과정, 학년에 걸쳐 시험관들은 이 학생이 과연 왜? 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제출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뉴질랜드의 3대 학습과정 (NCEA, Cambridge, IB) 에서는 어떤 형식의 답변을 요구할까요? 주로 서술형의 답변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논리적 사고와 더불어 논리적 서술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데요.. 이상하게도 많은 경우에 논리적 서술 능력이 간과되고는 합니다.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끔 이런 주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방금 배우고 숙지한 내용을 저에게 가르쳐 보라고 말이지요. 만약에 가르칠 수 없다면 그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술형 답변을 정확하게 작성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가르칠 수도 있어야 하는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논리적 서술 능력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훈련해야 계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을 키우며 관찰 일지를 쓰게 하거나 매일같이 날씨를 기록해 연간 변화 추세를 설명하게 하는 등의 가벼운 관찰 분석 활동은 아이들이 관찰, 분석, 예상 능력을 함양함과 동시에 논리적 서술을 수련하는 좋은 활동이 될 것입니다.
위의 세가지 포인트 이외에도 여러가지 많은 좋은 정보들을 취사 선택하셔서 가정 기반 조기 과학 교육을 시행해 나가신다면, 그래서 집이 곧 학교가 되는 하루하루를 이루어 가신다면, 뉴질랜드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조금은 더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