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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틀에서 보면,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음력 1월에 점화되어 1895년 3월에 일단락되었어요. 14개월에 걸쳐 숨 가쁘게 많은 일이 일어났지요. 그때의 여러 가지 사건을 세밀하게 하나씩 천착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점을 간단히 설명하는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제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요.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물론 오늘날의 ‘유럽연합’ 같이 거대한 경제공동체는 아니었지요. 유럽연합은 국가 간의 협의를 바탕으로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경제공동체를 구성했어요.
동학농민들이 바랐던 것은요. 저의로운 경제,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거였다고 봐요. 한 마디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멸찬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강의의 초점은 ‘정의(justice)’라고 봐야겠어요.
정의라는 것이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겠지요.
그럼 말예요.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저의를 무엇이라고 해야 될지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흔히 성리학(유교)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해 ‘인(仁)’과 의(義)’의 학문이라고 하지요. ‘인’은 쉽게 말해 사랑이고요. ‘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정의에 가장 가까울 텐데 말입니다.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은 것이 바로 ‘의’입니다. 달리 말해, 인간의 도리에 부합하는 것, 하늘의 명령(天命)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는 것이지요.
옳다, 그르다를 구별하는 기준은 개인이나 어느 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아니지요. ‘공공성’을 갖추어야 옳은 거랍니다. 보편타당한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란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 부합되는 것이니까요.
하늘의 뜻이 중요해요. 하늘은 죽이기보다는 살리는 것을 위주로 한다고들 보았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 또는 ‘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결정은 사랑에 가득한 것이고, 그게 바로 의로운 것입니다. 만약 사람과 동식물을 함부로 죽인다면 그것은 결코 의로운 것으로 평가되지 못해요. 하늘은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동아시아의 사고방식은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리학이고 불교, 도교에 보편적입니다. 동학도 전혀 다르지 않아요.
하늘이 살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동학에서는 자연에서 답을 찾았어요. 가령 여기에 흙이 있다고 합시다. 내버려 두면 흙에서 변화가 일어나지요. 봄이 되면 이름을 무어라 하는 것이 되었든지 하여간 온갖 생명들이 다 거기서 일어납니다.
만약 여기에 물이 있다고 합시다. 가만히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다 놀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산 생명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살리는 데 자연의 자연다움이 있는 거죠.
자연은 모두를 공평하게 살립니다. 어느 한 종족이나 어느 한 종자만 살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체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평화롭게 잘 살게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자연의 뜻입니다. 이런 말씀은 저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고입니다. 물론 동학도 그러하고요.
동학의 경제 공동체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똑같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어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어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다 있어요. 인위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뜯어고치려 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들 수도 없으려니와 그렇게 만들 필요도 없지 않아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보다 몇 만배 중요한 이치가 있어요. 그것이 곧 ‘유무상자’입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덜어주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에게 고마워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보답하는 공동체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사는 그런 세상을 동학은 꿈꾸었어요. ‘유무상자’의 경제 공동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공동체인 것입니다.
동학농민들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을 통해 ‘유무상자의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폭력이 외부로부터 행사되었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방해의 칼날은 양날이었어요.
하나는 나라 안에서 왔고요. 다른 하나는 외세로 인한 거였단 말이지요. 동학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둘다 외부로부터의 방해였어요. ‘유무상자’의 새로운 공동체의 성립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그러한 세력에 맞서 동학농민들은 처절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어요. 이런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동학농민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파국을 향해 치달았어요. 요즘 말로,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거죠. 역사를 보면 로마제국이든 중국의 한나라든 많은 나라들이 양극화의 문제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쓰러지곤 하였어요. 14세기 후반에 조선이 무너뜨린 고려왕조 역시 그러했지요. 그런데요. 조선 역시 나라가 만들어진지 수백 년이 지나자 자꾸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을 보였어요.
동학농민들은 바로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는데 큰 관심이 있었지요.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이 ‘관계의 질적 전환’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을 제가 앞으로도 강조했잖아요. 어떻게 조정을 해서라도 동학농민들은 관계의 재설정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요. 평화적으로 될 것 같지가 않았어요.
1894년 초부터 1895년 봄까지 일련의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말하자면 동학농민들이 비상수단을 쓴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일련의 폭력까지 수반된, 과격한 운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이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