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물엔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 무심코 흐르는 냇물과 철썩거리는 파도가 만드는 거품도 그렇고 비를 만드는 구름과 바람이 빚어내는 일곱색 무지개도 그렇다. 우연에 의해 발견된 와인이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진화하고 있다. 와인 잔도 그렇다.
땀흘린 후에 마시는 막걸리의 텁텁하고 통쾌한 맛을 위해서는 역시 사발에 벌컥거리며 마셔줘야 한다. 희고 길다란 기생 오라비의 손보다는 묵은 상처가 있는 뭉툭한 손, 약간 이가 빠진 사기사발이면 금상첨화다. 막걸리사발처럼 큰 잔에 마시면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면서 혀에 닿는 부위가 넓어져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소주잔처럼 입구가 좁은 잔은 고개가 뒤로 젖혀져 혀에 닿는 부위가 좁아지기 때문에 단맛을 먼저 느끼게 된다. 심심치않게 사람들이 ‘오늘 소주가 달다’고 하는 것은 달리고 싶은 기분 탓이거나 작은 잔에 그 비밀이 있다.
와인 또한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혀의 어떤 부분에 얼마나 넓게 접촉하는지에 따라 느껴지는 맛이 달라진다. 혀끝은 단맛과 짠맛을 혀의 양옆은 신맛을 혀의 가장 안쪽끝에서 쓴맛을 느끼게 된다. 조물주의 완벽한 디자인 덕분에 음식의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와인잔을 고를때 입구가 나팔처럼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는 것보다는 안쪽으로 둥글게 휜 잔이 와인의 향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맛을 복합적으로 느낄수 있다. 하지만 가벼운 저렴한 와인을 볼륨있는 큰잔에 따르면 오히려 향기가 약하게 느껴져 더 싸구려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향기의 강약에 따라 와인 잔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레드 와인잔은 다시 탄닌이 풍부한 보르도잔과 탄닌이 덜한 부르고뉴의 버건디잔으로 나뉘지만 일반적으로 레드와인 잔은 화이트와인 잔보다 좀더 크게 만들어 탄닌의 텁텁함을 줄이고 과일향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혀끝부터 안쪽으로 넓게 퍼질 수 있도록 보울을 넓게하는데 이는 공기와 접촉하는 와인의 면적을 넓게해 와인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줌으로써 다양한 부케와 풍부한 아로마를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화이트와인은 기본적으로 탄닌이 없기 때문에 보울의 크기가 작아도 된다. 화이트와인잔은 레드와인잔보다 작으며 차게 마시는 화이트와인의 특성 때문에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용량을 작게 만든다. 또 레드와인잔보다 덜 오목하며 상큼한 맛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와인이 혀 앞부분에 닿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스파클링와인잔은 입구가 좁고 길쭉한 튤립 또는 플루트모양으로 와인의 탄산가스가 오래 보관될 수 있고 거품이 올라오는 것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좋은 스파클링와인일수록 조그만 기포들이 길쭉한 와인 잔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잔에 절반이 조금넘게 담아서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와인과는 달리 막걸리는 넘치게 따르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단숨에 들이켜야 하는데 목울대를 요동시켜 넘어가는 소리가 꿀커덕 꿀커덕 바깥으로 나와줘야 제격이다. 통크고 호기롭게 냅다 들이붓고는 미련없이 사발을 입에서 떼내어 소반에 텅소리를 내며 내려놓아야 한국인이다. 술은 문화의 반영이다.
비가 많이 오는 덕분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夢)속처럼 펼쳐지는 무지개의 몽환적인 향연에 행복하다. 비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지 않은가. 행복이 인내(忍耐)의 열매이듯이 모든 것이 어떤 것의 결과이며 또 다른 것의 원인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그 이유가 있으며 만물(萬物)은 하나요 천지(天地)가 같은 원리이고 하나의 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