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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11. 17:03 안진희 (202.♡.85.222)
시티새댁의 육아일기
동글동글 큰 눈에 갸름한 얼굴. 뽀얀 피부에 우월한 기럭지. 월령에 비해 말도 잘하는데다 개월 수도 비슷한 여자 아이를 만났다. 카시트에 나란히 앉혀 놓으니 우리 아들 그래도 남자라고 과자도 건네주고 책도 나눠주고 지 먹던 우유까지 양보한다. 운전하면서 룸미러로 힐끗힐끗 훔쳐보니 아주 흐뭇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심하게 앞서가는 이 엄마는 둘이 사이 좋게 커서 서로 사귀게 되는 상상을 살포시 해본다.
이런 이런. 이제 겨우 19개월 된 아들을 놓고 벌써부터 여자 친구 생각이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 한번 꽤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들은 이곳 뉴질랜드에서 키위들과 섞여 자라면서 과연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될까. 눈이 파란 키위 여자를 데려오면 어쩌지? 그래 뭐 요즘 세상에.. 음… 그런데 우리 아들은 삼대 독잔데…. 음….. 음……
그럼 한국 여자는? 교민 사회가 좁아 섣불리 사귀기가 힘들다는데 이 틈바구니에서 인연을 잘 만날 수 있을까.. 남들은 교육 때문에 나온다는데 우린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
그래! 엄마인 내가 나서야겠어! 지금부터 비슷한 또래가 있는 집들을 찾아서 친하게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레 기회가 많아지겠지. 거 왜 드라마를 보면 엄마 친구 딸이랑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다 좋아져서 결혼하고 그러는 스토리가 많지 않은가.
흠. 이것 참 거국적인 장기 플렌이 따로 없네.
원래 엄마들 모임에 처음 나갈 때 생각은 또래 형들 만나서 같이 어울려 잘 놀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미래 며느릿감을 점지하러 다니고 있으니..
한국이 아닌 곳에 사느라 애를 키우면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이 배로 느는 것 같다.
아들이 자라 학교에 가서 키위 친구를 데려왔는데 뭔 말인지 못 알아 먹으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키위 친구한테는 뭘 대접해줘야 하나는 걱정을 넘어 스트레스가 될 지경이다. 학교 도시락은 뭘 싸줘야 하지? 애들이 도시락 가지고도 놀린다는데..
여기서 나고 자랐어도 한국말 써가며 자라놨으니 처음 유치원에 간 아이들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들려온다. 이 어린 것이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부모가 남의 나라 온 덕에 괜히 고생시키는거 아닌가 싶어 마음이 짠하다.
노랑 머리 아이들 틈에서 항상 자신은 다르다라는 생각에 왠지 기가 죽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드니.. 아주 혼자서 별별 소설을 다 쓴다.
한국에서 학교 다녀도 놀림 받는 아이들이 있고, 괴롭힘 당하기도 하고, 영어 스트레스며 공부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데 어디서나 다 하기 나름이고 지가 알아서 잘 할텐데. 누가 삼대독자 아니랄까봐 이 걱정, 저 걱정 아주 그냥 걱정이 늘어지신다.
이 극성스러울 정도의 걱정과 또래 친구들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은 어쩌면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놓을 자신이 없어 그냥 삼대독자로 키우겠다 결심했기에. 형제 자매가 없어 얼마나 외로워할 지 알기에. 동생 안 만들어줬다는 원망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기에. 자신이 다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키위 사회에서 낳아놨기에. 커 가면서 평생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힘들어할 것이기에.
이런 생각들을 마음 속에 새기며 한국 밥 먹이고 한국 말 가르치면서 키우면 자랑스러운 한국 인이라는걸 잊지 않고 커나갈 수 있을까? 한국인이라는 주체성을 잃지 않은 채 당당하게 키위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
흠. 이거 참 대단한 독립투사의 후예가 따로 없네.
그래 아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건강하고 바르게만 커다오! 그러면 자연히 좋은 친구들과 좋은 짝을 만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