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 이거 웃긴데이. 할머니랑 화상하는데 잘하다 갑자기 할머니 싫다고 계속 소리지르고.. 어머니 맘 상하시구로..’
이런… 간만에 혼자서 느긋하게 장이나 보고 오려고 부자를 떼놓고 마트에 댕겨왔더니 그새 부자 사이가 여엉 냉랭해져 있다. 할머닌 또 무슨 봉변이시누.
할머니랑 화상 통화하면 늘 신이나서 이것도 보여드리고 저것도 보여드리고 온갖 재주를 선보이다 돌아서면 또 통화하겠다고 한참을 난리인 녀석인데 왜 뜬금없이 심통을 부렸을고..
이건 뭐 내가 백화점 쇼핑을 룰루랄라 댕겨온 것도 아니고 식구들 먹일 것 사러 마트 좀 여유롭게 다녀오겠다는데 그거 잠깐 갔다왔다고 이 난리가 나나.. 내가 죄인이네 내가 죄인이야… 괜히 혼자 또 맘 상해서 장 봐온 것들을 꾸역꾸역 챙겨 넣으며 속으로 궁시렁거리다 아들 기분이라도 풀어줘야겠다 싶어 물놀이를 제의했다.
‘아들, 첨벙 놀이 할래?’ ‘물놀이. 시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갑자기 ‘점마 저바라. 또 싫단다. 물놀이 좋아하면서 왠 승질이고!’라며 쏴 붙인다.
잉? 이거 싫다고 한거 아닌데. ‘시요!’는 ‘해주세요.’라는 뜻인디? 그러고 보니 통화를 하면서 아들이 전화기를 손에 쥐면 화면을 건드려 끊어질까봐 전화기를 쥐어주지 않았더니 달라는 의미로 ‘할머니. 시요.’ 즉, ‘할머니 전화기 주세요.’라고 계속 말했던걸 잘못 알아 들었던 모양이다.
말이 짧은 우리 아들은 해주세요라는 4음절 단어를 한번에 소화하지 못하고 항상 시요라고 표현한다.
하긴. 나도 종종 헤깔려서 아들이 ‘시요!’라고 하면 ‘해줘? 말아?’라고 되묻곤 한다. 하도 그랬더니 이제는 지가 원하는 게 아니면 아들은 ‘말구말구’라며 엄마의 언어를 응용한다.
아들이 어느새 커서 조잘조잘 말이 늘어 대화가 되는 즐거움이 생기긴 했지만 거참 알아듣기 쉽지 않은 것도 태반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들도 어찌나 많은지.
처음 말이 늘기 시작할 때는 아저씨들만 보면 ‘아씨, 아씨’하고 소리를 질러 주변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밖에 나가고 싶을 땐 ‘시발, 시발’하며 신발을 찾아대는데 참 듣기 민망하더라. 누구는 애가 ‘시발, 시발’ 하길래 어디서 그런 욕을 배워왔나 싶어서 엄청 혼을 냈다더라는…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말들은 감정을 어찌나 잘 살려서 말하는지…
말이 늘기 시작하면서 아들은 새로운 표현들을 계속해서 익히려는 의지인지 ‘엄마. 지끔. 모해요?’라는 말을 달고 산다. 내가 ‘엄마 지금 뭐뭐해.’ 라고 알려주면 ‘엄마. 지끔. 뭐뭐 해요?’라고 꼭 다시 문장을 만들어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것도 내 발음하는 입 모양을 봐야 직성이 풀려서 다른 데라도 보고 얘기하면 꼭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자길 보도록 해서 말하게 한다. 여간 피곤한게 아니지만 말을 배우려는 의지가 가상해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이제 말이 좀 되니 말 잘하던 친구랑도 크게 몸싸움 할 일없이 인간답게 놀곤 한다.
‘어. 바다다!’ ‘어디?’ ‘쩌어기’‘우와아~’ 처럼 경치를 보고 함께 느낌을 공유하기도 하고.
‘손잡아.’ ‘손잡아 시러!’ ‘우엉~ 손잡아~’ 처럼 나름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들이 늘어나면서 종종 무슨 낱말 퀴즈를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들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같은 단어를 계속 무한 반복하고 난 나대로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을 유추해서 이것 저것을 던져보다 겨우 하나 맞추면 환호성을 지르곤 한다. 그런데 왜 나만 즐거운 건지. 아들은 무덤덤한 것을.
아들. 언젠가 다양한 언어를 많이 많이 익히고 나면 정작 엄마랑 대화가 안 통한다고 엄마를 상대해 주지 않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엄마랑 이렇게 울고 웃으며 함께 말을 배웠던 날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줄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아들이 엄마에게 새로운 단어들을 가르쳐줘야 할 지도 모르겠지? 엄만 짜증내지 않고 잘 배울게. 부디 언제까지나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