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와보니 식탁 위에 먹다 남은 요플레 하나가 놓여있다. 아들의 숟가락이 꽂혀 있는 걸로 봐서는 분명 아들이 먹다 남겨놓은 듯 한데.. 참 이상하다. 어제 내가 사다 놓은 요플레는 분명 딸기맛 큰 통이었던 것 같은데 이건 복숭아맛의 작은 통이다. ‘신랑이 사왔나.. 이건 왜 먹다가 이렇게 놔뒀데..’ 궁시렁 궁시렁 해가며 치우려고 하는데 헉… 뚜껑에 적힌 유통기한이 2달이나 지나있다. 이런걸 퍼먹고도 멀쩡하게 잘 놀고 있는 아들도 신기하지만, 냉장고 한 구석에서 이런 유물급 요플레를 찾아준 신랑은 더 신기할 노릇이다.
냉장고가 무슨 대문짝 만한 것도 아닌데 우리집 냉장고 속에는 한번 들어가면 잊혀지는 것들이 종종 있다. 한 번씩 뭘 찾다 보면 언제부터 굴러다녔는지 모를 박제 수준의 키위가 발견되지를 않나, 말라 비틀어져서 바닥에 붙어버린 파 줄기가 발견되지를 않나.
물론 냉장고 안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밖에 보관하는 양파나 감자 같은 것들은 자연 관찰 도감을 출판해도 몇 권을 했을 법할 정도로 싹이 나고 증식해 가는 과정을 줄기차게 보아왔다. 늘 먹을 만큼만 산다고 하는데도 어디선가 소외된 녀석들이 몰래 몰래 싹을 틔우고 있더라. 필요할 땐 안보이던 것들이 우람하게 싹을 틔우고 나면 보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냉장고는 가득 차 있는데 먹을 건 없다, 옷장에 옷은 많은데 입을게 없다.’는 인류가 풀어야 할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닐까 싶다.
냉장고에서 두 달 가량 숙성된 요플레를 먹은 아들은 며칠이 지난 후에도 별탈 없이 잘 놀고 있다. 정말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아들이 어릴 때는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나의 구세주 데톨을 옆에 끼고는 보이는 대로 뿌리고 닦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위생이라는 건 잊혀진 지 오래가 되어버렸다. 젖먹이 시절 육아의 필수품이었던 가제 수건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가제 걸레로 변신해 입도 닦고 손도 닦고 바닥도 닦고 다시 또 입도 닦고 내친김에 얼굴도 닦고. 좀 더럽게 키우는 것이 오히려 더 튼튼하게 키우는 방법이라는 것을 어느 날 문득 계시처럼 깨닫고 난 뒤부터는 위생을 너무 푸근하게 잊고 살고 있다.
아들을 가졌을 때 입덧도 너무나 심하게 하고 치골통이며, 가진통이며 남들 한다는 거는 주구장창 모아서 다 겪다가 막상 놓을 때도 3일간 병원을 들락거리며 죽네 사네 겨우 놓고, 분만할 때 출혈이 너무 심해서 수혈 안 하면 퇴원 못한다 하는 거 곧 죽어도 안 받겠다 우겨 몇 달간 철분약을 들이부으며 버티면서 이 고통을 절대 잊지 않고 하나로 만족하고 잘 키우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사실 다 잊혀지더라. 이래서 다들 둘째도 놓고 셋째도 놓고 하나보다.
아들이 걸음마에 익숙해졌을 무렵 지나가다 햇볕이 좋길래 아오테아 광장에서 한 시간 정도 놀린 적이 있었다. 잠깐 놀다 갈거라 썬크림을 안 발라줬었는데 헉. 그날 저녁부터 아들의 눈 밑에 조그마한 반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짙어져 큰 점으로 자리 잡는 게 아닌가. 아들의 점을 볼 때마다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며 이제는 베란다만 나가도 썬크림으로 얼굴을 도배해준다. 아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내 얼굴에도 기미가 낀다는 것은 잊은 채 아들 얼굴에만 썬크림을 바르는데 열중한다. 나도 한 때는 소중한 ‘나’였던 것을…
아들아! 이 엄마가 다른 건 다 잊더라도 네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네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었는지, 네가 처음 말을 재잘거리기 시작할 때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그때의 그 기분들과 다짐들은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 엄마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네가 좀 기억해 줄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