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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실컷 놀고 버티다 낮잠도 아닌 밤잠도 아닌 잠을 느즈막히 자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9시 반이 넘는 시간에 깨서는 새벽 1시가 넘어서는데도 잘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너 얼른 잠 안자면 내일 산타 퍼레이드 엄마랑 아빠만 보러 갈거야!” 달래도 보고 강요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자 급기야 협박 작전을 썼다.
아들은 엄마 아빠만 보러 갈 거라는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자입을 만들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글어엄… 나는 아이챌린지 보고 이쓸 테니까 엄마라앙 아빠라앙 얼른 보고 와야 돼~” 허걱.. 예상한 반응은 이게 아니지 않는가. 나도 갈래~ 하고 울면서 매달리던가, 그럼 얼른 잘께 하던가 뭐 이런 반응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아들은 요즘 아주 엄마아빠 머리 꼭대기에 올라 서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 뱉어서 놀라게 하지를 않나, 얄궂은 발상을 내 놓아서 당황스럽게 만들지를 않나.
눈이 좋은 아들은 애기 때부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가닥도 정확하게 집어내곤 했었다. 요즘도 맨날 내 눈엔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자꾸만 보라고 난리일 때가 많다. 운전을 해서 퀸스트릿의 윗콜스 앞을 지나는데 뒤에 앉은 아들이 자꾸만 윗콜스 위에 싼타 좀 보라고 성화다.
“으응.. 보여.. 우와아~ 크다아~.” 뭘 보라 그러면 늘 내 반응은 비슷하다. 대충 보고 잘 안보여도 엄청 과장한다. 그래야 덜 피곤해진다는 것을 경험에서 익혔다. “엄마, 여페 코끼이도 이써! 코끼이!” “으응? 코끼리? 저건 코끼리가 아니라 루돌프 사슴이야~” “아니이~ 쩌어기 여페. 쩌어기” 으음… 건물 창 밖으로 환풍용 덕트처럼 보이는 관이 두 개 나와있는 걸 보고 코끼리라나 보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엄마, 엄마, 음머어~ 소도 이써!” 끙… 소는 또 어디 있대… 암만 비슷한 걸 찾아보려 해도 안 보인다. 마침 신호도 바꼈고 해서 “소는 안 보이는데… 어디 있나…” 하고 넘기려는데 아들 왈. “쩌어기 있는데 안보여? 엄마 렌즈 더 껴야게따.” 헐~ 평소에 내가 렌즈끼는 걸 유심히 보더니… 다 컸다 다 컸어.
아들이 냉장고에 잔뜩 붙은 한글 카드들을 막힘 없이 한 번에 읽어내고 나면 나는 엄마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놀라움과 대견함을 잔뜩 실은 과장되고 흥분된 어조로 “우어어~ 우리 아들 대단한데!”를 한번 날려준다. 그러면 겨우 손가락 치켜드는 게 다 이던 아들이 어느 때부터 인가 “이 정돈 기본이지~” 하고 맞받아친다.
부쩍 큰 키에 새삼 놀라 “우리 아들 엄청 많이 컸네~”라고 추켜주면 아들은 “나 밥 마아니 먹고 쑥쑥 커찌이~ 그럼 이제 마아니 컸으니까… 콜라 머거도 되?” 이런다. 뭐 못 먹을게 있으면 “아들은 밥 많이 먹고 쑥쑥 많이 크면 먹을 수 있어” 라고 맨날 그랬더니 이젠 이렇게 되 받아 치는 것이다.
말을 원활하게 하기 시작하니까 아들이랑 있는 시간이 크게 힘들지도 않고 별로 싸울 일도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몇 달째 큰 분란이 없는 평화협정 기간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한 동안은 니가 집을 나가지 않으면 내가 나가네 어쩌네 하며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하루하루를 보냈건만. 어느새 그런 시간은 추억이 되어 버렸으니..
잘 자라 준 아들이 고맙고 여태까지 잘 버텨온 내 자신이 대견하다.
지금의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열심히 지금을 즐겨야겠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으로 엄마의 말문을 턱턱 막아버리지만, 그날의 어록을 다 기억해 퇴근 후 아빠에게 들려주기도 벅차지만, 대화가 안 통해서 답답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이 백배 천배 재미난 것을.
아들! 나중에 많이 커서도 지금처럼 엄마 아빠한테 재잘재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해~ 엄마랑 아빠는 언제나 너랑 얘기하는 게 즐겁고 행복할 테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