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뭐 먹었어?” 아들을 유치원에서 픽업해 오면서 의례적인 질문을 했더니 “음…. 쿠뢰커랑..” 헐… 발음이 어찌나 굴러가는지… 한껏 힘을 줘서는 ‘쿠뢰커’라니… 어제까지만 해도 ‘쿠키’라고 답하더니 여어…
유치원에 쫌 다녔다고 요즘은 영어 한 마디씩 하는걸 보면 발음이 아주 그냥 끝내준다.
“엄마,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에포오올이랑 아우렌쥐랑…”
나는 암만 발음해도 그냥 ‘애플’ 이고 ‘오렌지’ 인 것을 ‘에포오올~ 아우렌쥐~’란다.
집에 와서 자동차를 타고 놀면서 나름 지 혼자서 “뢰에드~ 옐로오~ 구리인~”이라고 외치며 신호등 놀이를 한다.
거참. 왜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실 때 ‘레드, 옐로우, 그린’이라고 가르쳐 주셨을고… 이제는 발음나는 대로 영어를 표기해야 한다던 예전 어느 장관의 말씀처럼 진작부터 우리도 ‘크래커’가 아니라 ‘쿠뢰커’라고 배우고 ‘레드’가 아니라 ‘뢰에드’라고 배웠으면 이 구수한 된장 발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키위 아이들은 말도 잘하고 대부분 소리 규칙인 파닉스를 알고 있으니까 우리 아들도 따라 가려면 집에서 좀 가르치라며 선생님께서 특별히 파닉스 연습용 자료를 챙겨주신다.
흠… 근데 이걸 내가 가르치려니 아무리 노력해도 잘 나가는 버터 발음을 된장 발음으로 망칠 것 같아서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좀 더 크면 엄마 아빠 발음을 막 지적하기도 한다는데…
픽업을 가면 놀고 있던 아들이 바로 손 털고 오려고 하지 않으니 아들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함께 좀 놀아줘야 그제서야 손 털고 집으로 따라 나선다.
놀면서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 참… 4살짜리들 인데도 영어가 청산유수이다. 재잘재잘 어찌나 말도 많은지 쉴 틈 없이 말들을 쏟아내는데 내 수준에서 볼 때는 어찌나 고급스러운 문장들인지.. 내 평생 한 번 써보지도 않은 ‘접속사’들을 마구 써가며 그 어렵다는 가정법 구문과 관계대명사 구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화려한 문장들을 쏟아내는데… 아.. 내가 이 꼬맹이들만큼만 영어를 해도 소원이 없겠다. 그런 원어민들 틈에서 섞여서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드’가 ‘뢰에드’가 되고 ‘오렌지’가 ‘아우렌쥐’가 되나 보다.
이제 아들도 세 돌이 되어서 토요일이면 한글 학교에 가는데 따라가서 보면 좀 더 큰 애들은 지들끼리 말할 때는 다들 영어로 대화를 나누더라. 돌아서서 들으면 완전 키위들끼리 대화하는 것 같다. 발음도 발음이고, 지들끼리는 영어로 말하는 게 더 편한가보다. 좀 더 크면 엄마 아빠랑 영어로 대화가 안 되서 답답해한다는데…. 이건 뭐 말 좀 할라해도 된장 발음이라 알아나 들을지 모르겠다. 아들한테 영어를 배우는 날이 올 수도 있겠군… 흠..
내가 암만 발음을 잘 하려고 노력해봤어도 ‘크래커’는 늘 ‘크래커’였는데, ‘쿠뢰커’라고 발음해 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거늘.. 역시 원어민들이랑 섞이다 보면 자연스레 버터가 잔뜩 발린 ‘쿠뢰커’라는 발음이 나오나보다.
여기서 키우는 애들은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아이가 집에서 한국말을 해야 한다는 것에 혼란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는데.. 초등학교 전까지 열심히 한국말을 가르쳐야 한대서 나름 열심히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우리 아들도 조금 더 크면 영어로 말하는 게 더 편해질 날이 오겠지. 한국에서는 좀 그만 보라고 말리는 TV 프로그램들도 여기서는 그나마 한국말 안 잊어먹게 하려고 열심히 보게 한다는데… 아들이랑 해피투게더를 해피하게 함께 보며 한국말 공부를 하고 앉아있을 날이 오려나…
아들~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서 영어도 배우면서 잘 지내줘서 엄마는 참 기쁘단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나중에 커서 한국말도 유창하게 잘 해줬으면 좋겠어. 두 가지를 다 완벽하게 하려면 많이 힘들겠지만 엄마가 많이 도와줄께. 누가 뭐래도 넌 한국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