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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2010. 14:20 NZ코리아포스트 (219.♡.21.112)
자녀교육 특강
마마보이는 그 부모가 자녀를 과잉보호해서 키우는 것이다. 과잉보호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잉보호란 화초나 나무를 분재하는 것과 같이 자라나는 아이를 쇠줄로 묶어서 구부리고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늘 온실에 가두어 두면 당장에는 예쁘게 자랄지 모르지만 눈보라치고 추운데 내어 놓으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을 평생 동안 온실 속에 둘 수 없다는 데 있다. 마마보이는 평생 동안 자기 품의 온실 속에서 자녀를 키우려고 한다.
건강한 부모는 자녀와 친밀감을 나누면서도 자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한다. 이와 달리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을 존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부모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면 자아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고 자신의 고민과 생각, 감정에 공감해주기를 바란다. 이 땅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원하지 않는 자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부모나 교사, 성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도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이다.
부모가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심리
- 자녀에 대해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개인적인 만족감
- 자녀에게 관심이 없는 부모라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자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부모의 죄책감
- 무슨 좋지 않은 일어날지 모른다는 조바심
- 아이의 성공이야말로 부모의 성공을 말해준다는 믿음
- 부모의 사명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아이들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는 생각
대체로 부모들은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주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더 많이 주는 것들, 예를 들어 더 많은 칭찬, 더 많은 용돈, 더 많은 장난감, 더 많은 과외 공부, 더 많은 자유 등은 종종 역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자녀를 과잉보호하고 자녀가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부모의 경우 그 저변에는 여러 가지 심리가 자리한다. 우선은 자기가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이다. 이것은 자녀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그것이 자녀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과잉보호하는 부모의 심리에는 자녀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자리한다. 자녀는 아직 어리므로 정확한 판단이나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 부모가 현명하고 정확하게 판단해서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다. 자녀의 모든 일에 계속 간섭하는 일이 지속된다. 이것은 자녀 입장에서 보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자녀를 믿지 못하면 자녀는 자존감을 키워 가지 못한다. 낮은 자존감은 삶의 모든 것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자아존중감을 잃은 아이들은 자기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다. 나아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역시 알지 못한다.
어려서 자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커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자녀는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경계한다. 그래서 계속 인간관계에 실패한다. 자녀를 너무 사랑해서 다 해주고 보호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인데, 그것이 오히려 아이의 자존감을 잃게 한다. 과잉보호는 자녀를 믿지 못하는데서 출발하며, 자존감은 부모의 믿음 위에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과잉보호하는 부모의 마음속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인 자녀의 양육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부모들은 자녀가 부모나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그들 자신이 부모로서 실패한 존재로 믿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와 자녀의 문제를 동일시하고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고통을 받게 된다.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얼마 되지 않은 용돈을 몇 달 동안 모으기 시작했다. 머리를 깎지 않고 버티다가 아빠가 미장원에 갈 때 따라 나섰다. 그래서 머리 깎는 돈을 아꼈다. 멀지 않은 거리는 걸어 다녔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았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아이는 친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 갈 날을 정하고, 시간이 되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모았다.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다.
아이는 그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시간이 다되어서야 돌아왔다. 8시간이 넘도록 친구들과 신나게 놀이공원에서 놀고 온 것이다. 돌아와서 물어보니 점심은 김밥으로 해결했다고 했다. 김밥을 먹고 음료수를 먹고 싶은데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수가 가게보다 훨씬 비싸서 못 사먹었다고 했다. 돈 천원이 아까워서 그것을 참은 것이다. 자기가 어렵게 아껴서 모은 돈으로 놀러 왔기 때문에 정말 오래 동안 신나게 놀 수 있었고, 돈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친구들과 놀았기에 더 재미있게 놀았던 것이다. 아이들끼리 가는 것이 내심 불안하기도 하고, 저렇게 보내도 되나 하는 걱정도 했지만, 그것은 정말 기우였다. 자녀는 부모가 믿어준 만큼 행동하고, 자율성과 책임감을 길러간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가 10대가 되어도 놀이공원 갈 때 함께 간다. 자녀가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에 대해 믿지 못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는 놀이공원 가는데 돈을 모두 부담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부모와 함께 가는 것이 즐겁겠는가,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즐겁겠는가? 부모가 데리고 가서 돈을 내주면 아이들이 돈의 가치를 알겠는가? 그래서 부모는 놀이비용을 모두 대주고, 시간 내고, 자녀 대신 줄서는 등의 희생을 하지만 정작 그 자녀는 제대로 즐겁게 놀지 못한다. 하지만 용돈을 아껴서 친구들과 간 아이의 부모는 돈도 들지 않고, 시간도 들지 않고, 희생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자녀는 자기동기에 의해 너무나 신나고 만족스럽게 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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