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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터넷을 1997년부터 정기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1990년대 중반, 박사 학위 논문 자료를 수집했을 때에는, 인터넷 사용법을 아직 몰라서 가야사 관련의 일체 논문들을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하나 하나 일일이 찾아내서 제 손으로 복사하는 등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던 것이죠. 요즘 같아서는, 2-3시간 내에 데이타베이스에서 다 내려 받아 챙길 수 있는데, 그 때 논문 자료 수집은 5개월 걸렸습니다. 인터넷이 삶을 바꾼 많은 사례 중의 하나죠.
인터넷의 어린 시절이라고 할 1990년대를 생각해보면, 그 때만 해도 인터넷을 “세계화” 담론과 대개 결부지어 논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네티즌”, “누리꾼”들에게는 어떤 “세계성”, “탈영토성” 등을 기대했던 것이고, 그걸 그 당시에 유행했던 “유목” 담론과 또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무장한 새 세대가 특정 국가나 민족에 속하지 않는, 각종의 경계선들을 자유자재로 월경할 수 있는 “보편인”이 될 것을,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습니다. 이건 “탈민족”, “탈국가” 등과 궤를 같이 하는 걸로 이해되며, 종합적으로 “탈근대”로 개념화되곤 했습니다. “국경 없는 인터넷”은 그 “탈근대”의 상징 그 자체이었죠.
러시아라는 초대형 근대 국가가 그 이웃나라에 대해 18세기나 19세기에 있었을 법한 “영토적 침략”을 벌이고, 그 이웃나라에서는 전형적인 “애국적 국민 동원”이 이루어지고, 서방의 국민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관계들을 최소화하면서 그 이웃나라를 지원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그 “탈근대”에 관한 그 당시의 기대들은 그야말로 “春夢”, 아름답지만 아무런 현실성이 없었던 일개의 “꿈”으로 느껴집니다. 1990년대 대기업 위주의 세계화 와중에서 좀 다르게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국가적 “근대”를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처럼 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다른 나라의 국적을 타고, 제3의 곳에서 일하는 자의 내지 타의의 “월경인”들은 물론 존재하지만 예외적 경우에 속합니다. 우리 동시대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국민”들이고 네이션, 국가에 대한 비교적 확고한 소속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그 의식을 강화시킬 뿐이죠.
일단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진 않죠. 한국 네티즘은 원칙상 국내에서 북한 사이트를 접근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아예 다수의 네티즌들이 국내망인 광명망만을 접속할 수 있으며, 중국에서는 상당수의 외국 사이트와 SNS 등이 차단돼 있습니다. 러시아도 페북을 접근 차단시키며, 요즘 유튜브 접근 차단 등을 논의하는 중입니다. 서방에서는 중-러-북 사이트를 접속할 수 있지만 예컨대 페북에서 공유하려 하면, “이 사이트는 .....의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는 꼬리표가 붙을 겁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지 말란 이야기죠. 반대로 CNN이나 BBC 기사를 공유하면 아무런 꼬리표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신뢰해도 된단 무언의 표시인 셈이죠. 그러니 인터넷이 전혀 영토성이나 국경이 없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미 가상 공간도 다 영토화돼 있죠.
그 영토화는, 그 이용 패턴들이 국적별로 다르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한국 네티즌이 네이버 같은 국내 포탈이나 카카오, 아니면 페북의 한글 내용 위주로 온라인 생활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반대로 중국이나 러시아 네티즌 중에서는 페북 이용자들은 극소수 (주로 재외 체류자)입니다. 중국인이라면 微信, 그리고 https://us.weibo.com/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가 하면, 러시아인들은 vk.com이나 ok.ru로 갈 겁니다. 그러니 페북 등 서방 SNS을 중심으로 해서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여론의 폭풍이 일어나도, 서방 SNS 자체에 노출되어 있지도 않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vk.com이나 ok.ru의 내용이야 당국의 “관리”를 계속 받는 것이지요. SNS 아닌, 일반 뉴스 포탈로도, 대개의 러시아인들이 dzen.ru 처럼 당국의 촘촘한 통제를 받는, 한데 이와 동시에 러시아 국내 사용자들의 구미에 최적화돼 있는 포탈로 가는 것이지, news.google.com으로 가지 않습니다. “국내인 구미에 최적화돼 있는”가의 여부 이외에 중요한 부분은 “언어”가 차지합니다. 러시아의 인구 중에서 영어 능통자들은 약 5%에 불과합니다. 한데 러시아보다 훨씬 더 미국 언어나 문화에 노출돼 있는 한국이라 해도, 별 불편없이 영문 등 해외 포탈이나 SNS 등을 한글이 아닌 영어 등 외국어로 할 수 있는 인구는 과연 전체의 10%를 넘을 수 있을까요? 결국 “언어”야말로 인터넷에 새겨진 가장 넘기 힘든 “국경”으로 기능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 인터넷이란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네이션, 내지 국민에의 소속 의식을 차라리 강화시키면 강화시키지,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말기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각종의 퇴영적인 군사적 애국주의, 국민주의 등등이 계속 더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고, 인터넷은 오히려 그 애국주의의 만연을 더 도와주고 있을 겁니다. 인터넷 이상으로 더 큰 문제는, 민족/국민주의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계급” 담론이 너무나 약화됐다는 사실이죠. 사실 단순한 “매체”인 인터넷보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제일 큰 문제입니다....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