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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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9/2010. 17:34
NZ코리아포스트 (122.♡.159.81)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나의 꿈을 얘기하겠습니다. 침대 칸이 있는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몇 날 며칠, 기차는 벌판을 달리고 풍경은 끝없이 물러나고 시작되고 뒷걸음치다가 앞장서곤 합니다. 나는 반갑게 다가오는 풍경들을 어루만지렵니다. 동 터오는 새벽녘의 긴장과 해 뜨는 아침의 다정함, 이유 없이 수선스런 한 낮과 미진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 태양, 소슬한 밤의 회색 빛 살결들에 입맞춤을 하렵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에 오지 않았습니다. 우주와 생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왔지요. 보아 뱀처럼 길고 유연한 기차는 긴 혀를 날름대며 나를 꾀어냈지요.
“이 열차의 종착역은 ‘행복의 나라’야. 그 나라에 도착하면 저절로 행복해져, 누구든지.”
추운 모텔 방에서 뉴질랜드의 첫 밤을 보냈습니다. 나는 어느 별똥별에서 떨어져서 그 시간에 거기 있었던 것일까요? 문을 열고 나가봤자 검은 어둠 뿐인 그 밤, 나를 내려놓은 ‘은하철도 999’는 하늘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지요. 그 밤, 나는 목을 졸라오는 어떤 그리움 때문에 죽을 뻔 했습니다. 성냥 곽 같은 나의 집, 도서관, 떡볶이 집, 때를 벅벅 밀어대던 목욕탕, 플라타너스가 잎을 떨구던 거리, 강아지와 뛰어 다니던 공원, 무진기행이라는 찻집, 신촌의 바람부는 거리, 거리들---. 토포필리아(topophilia), 모든 생명체를 관통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다지도 깊을 줄은 몰랐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남기고 온 사람이나 강아지에 대한 슬픔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만, 그 첫날 밤 내가 박하 향내 짙은 담배를 피워물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숨막힘은 장소에 대한 사랑, 그리고 별리(別離) 때문이었지요.
뻥 뚫린 가슴 때문이었을까요? 병을 앓고 나서 어쩜 오래 살지 못할지도,라는 생각에 서두른 것일까요? 엉덩이에 뿔난 년들이 글을 쓴다는 선배의 악담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4년 전이었지요. ‘김영나의 행복찾기’를 시작해 놓고 찬바람 부는 역사(驛舍)에 서서 오지 않는 열차를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참 어설프고 암담했습니다. 불행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지요. ‘행복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간신히 올라타게 되면 100 정거장만 가보리라고 마음 먹었지요.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저는 이제 그만 열차에서 내리려 합니다.
이번 여행은 제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도 아니었고, 공명심 때문도 아니었고, 엉덩이 뿔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나이 먹어가는 일과 사는 일이 뭔지, 자판을 두드려대며 가다보면 좀 나아지려나,하는 생각이었지요. 부실한 몸과 아둔한 머리로 조금이나마 삶에 관대해지고자 평정심을 찾고자 열차를 잡아 탔던 것으로 이해해 주세요. 하여, 어렴풋 얻어낸 생각은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퍼내는 것’! 행복의 옹달샘은 표주박으로 퍼낼수록 차오르는 것이라는 평범한 답 뿐이예요. ‘행복’이 짜릿한 로토나 보물찾기가 아닌, 제 마음 속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진리는 확실히 좀 맥이 빠지긴 합니다만---.
웹 서핑을 하면서 누군가의 글을 읽다보면 본 글보다도 긴 댓글들이 꼬리를 달고 있지요. 함께 여행하면서 조곤조곤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참 좋겠다,부러웠어요. 저는 저의 아바타 같은 친구들을 갖고 싶어요. 그게 욕심이었는데, 제 글을 통해 많은 친구를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랬지만, 수줍어서 댓글을 썼다 지웠다 하셨다는 K선생처럼 숨어서 제 글을 읽고 저와 함께 4년 간 여행하신 이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믿어요. 제가 여행하는 동안 바라봐주시고 소근거려 주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돌아보면 제 삶의 전반이 그렇듯이 역시 많이 창피합니다만, 아파도 슬퍼도 답답해도 억울해도 외로워도 그저 쓰느라 몹쓸 생각을 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한 정거장, 두 정거장 --- 무려 1백 정거장을 저와 함께 발맞추어 주신 KOREA POST에 감사드립니다.
KOREA POST 웹 사이트가 훌륭히 구축된 그 시점에 제가 글을 쓰게 된 것도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KOREA POST는 앞으로도 더욱 좋아질 거예요.
오랫동안 타고 온 기차에서 내리면 잠시 당황하게 되죠. 집 잃은 미아처럼, 우주 공간에 팽개쳐진 별똥별처럼 헛헛해서요, 잠시 뭉그적거리지요. 특별히 나처럼 토포필리아가 깊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열차를 타고가지 못해 한(恨)스러워서, 시원하면서도 섭섭하고 그리우면서도 야멸찬 눈빛으로 ‘행복이라는 이름의 열차’가 떠난 철길을 오래도록 바라보겠지요. 참 괴상하고 야릇한 감정으로 천천히 역사(驛舍)를 빠져나와 ---.
뻔한 일이죠. 또 다시 별똥별처럼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동이 트기도 전에 기차역으로 달려와 어디론가 떠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첫 차는 몇 시쯤올까 서성이면서, 조바심을 내면서 말이죠. 그 때 혹시, 파란 여명의 시간에 새파랗게 질려서 바람결에 서 있는 저를 보게 될는지요. 용기 내어 염치없는 부탁을 드리자면, 부실한 사람이 또 어디로 떠나려는지,너무 두근거리지나 않는지 토닥여주시고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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