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와의 슬픈 추억 한 토막을 얘기하겠다. 해마다 12월이면 퀸 스트리트 W 건물 벽에 산타가 나타났다. 산타는 윙크도 하고 손가락도 까딱거리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산타와 눈맞춤을 하곤 했는데, 그 때 산타는 특별하고도 은밀한 윙크와 손짓을 내게 보냈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선물 보따리 대신 건물을 짊어지고 나타난 산타를 눈감아주곤 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해가 거듭될수록 산타는 고질고질해졌다. 손가락은 관절염에 걸린 듯 구부렸다 펼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윙크하려고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올리는 일조차 힘겨워 보였다. 나는 산타의 눈꺼풀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산타는 까무룩 정신줄을 놓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려 눈꺼풀을 번쩍 치켜올리곤 했다.
그러다가 지난 해, 산타 눈꺼풀이 아예 장막처럼 닫혀버렸고 손가락 동작도 멈췄다. 벽 위에서 명을 다하신 것이다. 목울대로 큰 슬픔이 꿀꺽 넘어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항상 웃음 가득 머금은 눈빛에 동글동글 발그레한 볼, 굵은 허리통에 빨간 바지가 멋스러운 산타, 오래도록 기억하겠어요. 맨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등줄기가 시려운 낯선 이방인이었는데, 당신은 내게 따뜻한 불을 지펴주었지요. 고마웠어요 산타, 이제 편히 쉬세요, 안녕!’
아, 그러나 12월은 산타와 함께 다시 돌아오는 것! 올해, 새로운 산타가 등장했다. 새 산타는 예전 산타가 서 있던 벽 위에 올라가 촉촉히 내리는 여름비를 맞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차갑고 낯설어지는 도시의 밤, 홀로 지새우기 힘드셨는지, 순록 두 마리를 양 옆에 보디가드처럼 거느렸다. 순록은 관을 높이 세우고, 당장이라도 솟구쳐 뛸 듯한 기세로 여름 비를 튕겨내고 있었다. 나는 아들과 새로 데뷔한 산타에 대해 오래도록 이 궁리 저 궁리를 했다.
“새 산타는 좀 근엄해 보여.”
“무게 좀 잡아보겠다는 --, 뭐 그런 표정이네요.”
“글고 산타 파트너는 루돌프 아니니?”
“원래 산타는 순록을 타고 다니셔요.”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그 노래는 뭐야? ”
“그건 그냥 노래구요, 산타 고향은 핀란드잖아요---거기는 순록이 대세예요.”
“그으래---? 새 산타는 윙크도 손 인사도 안한다!”
“기술적으로 어려운가 봐요. 고장도 잘 나고---”
“어쨌거나 (좀 섭섭하지만) 산타와 순록! 쌍수들어 환영해.”
꿈도, 삶의 향기도 잃고 군내 나는 일상에 매몰된 우리들에게 가끔은 동화 속 얘기가 필요하다. 진정 행복하고 싶다면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줄을 쫙쫙 뽑아 희미한 환상이나 꿈이라도 낚아채야 하는 것. 12월의 퀸스트리트에는 낚을 것이 많다. 산타에 이어 또 다른 황금 어장은 Smith & Caughey’s 백화점. 3,4년 전, 12월 어느날, 나는 Smith &Caughey’s 백화점 앞을 지나다가 쇼 윈도우에 꾸며진 동화 나라에 매혹되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놀랍고도 훌륭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위선과 타락의 도시 한 가운데 피어난 숭고한 꿈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12월이 오면 나는 그 곳 쇼 윈도우 앞에 선다.
올해는 Jane O’connor의 동화 ‘Fancy Nancy’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마치 만화경처럼, 백화점 전면 유리마다 동화 속 장면이 오밀조밀 꾸며져 있다.
“우리 집은 그렇게 때깔나는 집은 아니지만, 쨔아 쨔쟌! 크리스마스 때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무지 좋아해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기 위해선 할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를 기다리면서 비스킷도 굽고 선물 포장도 하고 캐롤 송도 부르는 낸시네 가족. 그러나 기다리는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성급한 아이들이 나무를 세우다가 부러뜨리는데--- 마침내 할아버지가 오셔서 멋진 트리가 완성되고, 크리스마스 아침은 한 마디로 splendiferous!
유리창 밖으로 전나무 향기가 솔솔 새어나오고, 맛있는 쿠키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고, 낸시네 가족들의 캐롤송이 들려 오는 그 곳, 사랑으로 온몸이 간질간질해지고 싶다면 12월, 퀸스트리트를 걸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