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다닥씨의 편지-맛있게 잡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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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11. 09:54
김영나 (202.♡.85.222)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세월이여, 나는 당신을 ‘화다닥 씨’라고 부르겠어요. 화다닥화다닥 뛰어다니면서 홍안에는 구불구불한 고랑을, 칠흑 같은 머리에는 하얀 서리를, 여린 가슴에는 날카로운 비수를 꽂으니까, 그리 예쁜 이름을 지어줄 수는 없지요.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 남은 달력을 보는 요즘, 내 심장이 어디에 있을까요? ‘덜컥’ 떨어져서 배꼽 근처에서 겨우 팔딱거리고 있지요. 열 몇 살 즈음에는 ‘화다닥 씨’가 반가웠어요. 부모님의 간섭, 입시 지옥에서 해방돼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르리라, ‘화다닥 씨’여, 빨리 왔다 빨리 가고 또 빨리 왔다 빨리 가라. 신나서 가슴이 콩닥거리고 흥분되었지요.
인생의 봄을 보내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게 되자 비로소, ‘화다닥 씨’가 말도 안되는 불한당 같은 놈이라는 것을, 번개를 맞은 것처럼 화들짝 깨달았네요.
이 세상이 음모론으로 가득차 있다지만, ‘화다닥 씨’의 꼼수에 비길 바는 아니죠.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가 편찮으셔서 젖을 먹지 못했죠. 우유라도 먹으면 좋으련만 가짜는 싫다며 고무 젖꼭지를 밀어냈답니다. 모두 내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짐승처럼 잉잉 미음 한 술씩 받아먹으면서 체중 미달인 채로 한 살을 먹었지요. 내 생애 최초로 납득할 수 없는 ‘나이 먹음’이지요. 요즘도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아이 얘기가 들리면, 나는 흠칫 떨려요. 기억의 시계(視界) 제로 시절 얘기는 세월이 흘러도 순도 백 퍼센트의 절망, 상처, 두려움이니까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신영복교수(성공회대)는 옥중에서 형수에게 편지를 썼어요.
“징역살면서 먹은 나이는 나이에 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신 시대였던 1968년, 27세에 감옥에 들어가 20년 20일 만에 출소한 신영복. 마흔 일곱이 되었지만 스물 일곱이라고 왜 믿고 싶지 않았겠어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감옥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레테의 강 언저리쯤이 아닐까요. 그러니 아무리 세상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수감생활을 해왔던 성자(聖者)라 할지라도, 어찌 잃어버린 삶에 대한 회한과 억울함이 없겠어요. 더구나 청춘의 일년은 퇴색되는 시절 10년, 20년과도 맞바꿀 수 없는 환장하게 고운 날들이 아니던가요. ‘화다닥 씨’, 당신이 그렇게 사이코패스처럼 나이를 먹도록 강요하는 일들이 정말 야속해요.
인디언 샤이엔족이 왜 12월을 ‘늑대가 내달리는 달’이라고 했을까요? 한국 고유어로는 ‘매듭달’이지요. 그러나 12월은 야무지게 마무리 된 맵시 있는 ‘매듭’ 보다는 ‘눈 내린 들판을 미친듯이 내달리는 늑대’ 쪽에 가깝지요. 늑대는 울부짖으며 회한에 차서 가슴을 쳐대면서 ‘화다닥 씨’로부터 도망가지요. 감동이나 존엄함, 행복을 잃고 헛살아서지요. 이를테면---,
<A. 죽고 못살던 지인에게 전 재산을 사기 당했어. B. 모기지를 갚지 못해서 30년만에 마련한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 C. 칼리지에 다니는 애가 패싸움을 해서 재판 중이야. D. 남편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어. 임신 중이래. E. 기러기 아빠로 10년 살았는데, 아내가 보내 준 돈을 모두 카지노에서 탕진했대. F. 암에 걸려서 수술하고 항암치료 받고 온 몸에 털이란 털은 모두 빠져버렸어.>
‘화다닥 씨’, 혐오스럽지요? 지면 관계상 F까지만 얘기했는데, 천일야화도 가능해요. ‘시네마 천국’이란 영화에서 신부님이 남녀상열지사 장면에서 기겁하면서 종을 흔들잖아요. ‘화다닥 씨’도 우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 잠시 ‘멈춤’ 모드가 되어서 그 부분은 커트해주면 안될까요? 반대로 하늘로 붕 날아오를 것 같은 시간들은 마구마구 늘려주세요. 나는 우울하면 ‘시네마 천국’ 마지막 장면을 보곤 해요. 엔리오 모리코네의 음악과 키스의 봇물은 애가 타들어갈 만큼 엔도르핀을 샘솟게 하죠. ‘화다닥 씨’, 엔도르핀의 시간들만 메뉴판에 적어놓고, 그때그때 입맛 따라 골라먹으면 안될까요?
‘화다닥 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혀를 끌끌 차면서 ‘2012’를 툭 던져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2012’를 훅 불어서 그 안을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모든 건 다 네 탓이다. 나는 세상에서 젤 공평하다. 며칠 후면, 60억이 넘는 인구 모두 한 살씩 더 먹게 되니까. 나이를 왜 먹는다고 하겠니? 먹는 거 가지고 투정 부리면 삼대가 망한다. 기왕 먹는 거라면 달다, 쓰다, 시다, 떫다, 투정부리지 말고 둘이 먹다가 하나 죽을 정도로 맛있고 행복하게 먹도록! 만약 너무 달면 식초를, 너무 시면 설탕을 조금 넣고, 너무 쓰면 꿀을 좀 섞거나 오부라이트(먹는 종이)에 싸먹고, 떫으면 뜨물에 담갔다가 먹어. 그럼 참을만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