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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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4/2010. 07:58
NZ코리아포스트 (222.♡.88.44)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하던 K씨가 오클랜드를 떠났다. 비싼 가게세를 내면서도 근근이 버텨오던 음식점은 지난 해부터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해 최근에는 거의 개점 휴업 상태였다. K씨는 오클랜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북쪽의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목수인 P씨도 배를 타고 떠났다. 태평양 어느 섬 나라에서 집 짓는 일을 한다고 했다. 여행업을 하던 Y씨는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L씨는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북으로 간 K씨는 Dairy를 시작했는데 아직은 현상유지도 어렵다. P씨는 공사를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와 버렸다. P씨의 회사가 자금난으로 공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체불된 임금이나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Y씨는 공항 택시 승강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데, 손님보다 훨씬 많은 택시들이 길게 줄 서 있는 일이 다반사다. 3,40분 기다려 시동 한 번 걸면 다행이란다. L씨의 소식은 들려 오지 않는다. 손님과 생선은 사나흘만 지나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데, 어느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고 있는지 염려스럽다.
요즘 길을 가다보면 ‘LEASE’라고 써 붙인 가게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들도 손님들의 출입이 거의 없다. 그나마 뉴질랜드에서 죽지 않고 운영되는 사업은 1,2,3 달러짜리 물건을 파는 ‘달러샵’이다. 수입원이 한정되어 있고 지갑이 얇은 뉴질랜더들에게 달러샵은 요술 가게다. 신기하고도 요긴한 물품들이 그득할 뿐만 아니라 적은 돈으로 소비욕구도 채울 수 있으니 꾸준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따지고 보면 달러샵에서 소비하는 돈은 적은 돈이 아니다. 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고르다보면 1,20불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런 상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달러샵 출입이 잦다.
스시 가게도 키위들의 사랑이 면면이 지속되는 곳이다. ‘코리아 포스트’ 웹사이트 구인 광고란을 확인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달러샵이나 스시집을 해 볼 요량인 이들이 넘친다. 물론 사시사철 손님들이 줄서 있어 팔뚝에 이두박근이 생길 정도로 호황인 아이스크림 집이나, 꼬치구이에 따끈한 정종이 일품인 로바다야끼 집, 주머니가 두둑한 비즈니스맨들의 로비 장소인 고급 일식당, 포장마차식 소주집도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몫 좋은 곳의 잘 되는 가게는 권리금이나 렌트비가 만만치 않다. 특히 요즘처럼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상황에서는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망하기 십상이다. 조그만 달러샵이나 스시집이 그나마 안정적이라고나 할까.
글로벌 경기 침체의 여파로 비즈니스 뿐 아니라, 집을 잃게 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지난 해, 1274 세대가 모기지 세일로 집을 잃었다. 이 수치는 2008년의 519건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난 것인데, 2010년에도 그 기록을 갱신할 것으로 보인다.
모기지 세일로 집을 팔 경우, 매매 대금이 은행 융자금에 미치지 못하면, 나머지 돈은 집주인에게 빚으로 남게 된다. 때문에 모기지 세일의 위기에 처한 매물들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서 판매되기를 원하며 미리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4월 21일 현재 Trade Me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부동산(주거용)은 오클랜드 지역만 해도 1만 7천 8백 8개에 이른다. 매주 목요일 발행되는 부동산 광고지 Property도 지난 해부터 점점 두꺼워지더니 시간이 흘러도 얄팍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2000년 초,중반에 경쟁적으로 공급된 시내 아파트들의 적체가 심각하다. 지난 해 지인이 20만 중반에 구입한 아파트는 20만 초반이나 혹은 그 이하에 나와 있는데도 팔리지 않고 있다. Trade Me에는 ‘Urgent Sale’의 단계를 지나 ‘S.O.S’라는 헤드라인으로 자신의 집을 사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광고도 눈이 띈다.
부동산 시장이 심한 변비 증세로 누렇게 질려 버린 요즘, 집을 팔고 나면 주변에서 ‘축하합니다’라는 말들이 오고 간다. 우리 동네 마오리 아저씨 바니는 모기지 세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에 집이 팔리자 옥션장에 구경간 사람들을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집이 몇 달째 팔리지 않아 수심이 가득한 이웃집 피터는 바니를 축하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며칠 후,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던 바니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집을 괜히 팔았나 봐”
“왜?”
“렌트비가 너무 비싸. 우리 어디로 가야 하지?”
요즘 6% 안팎의 이자율로 20만불을 빌렸을 때 모기지 이자와 원금으로 매달 1600불정도가 나간다. 오클랜드 시내권에서 렌트집을 구할 경우, 방 2-3개자리가 통상 350안팎에서 450안팎에 이른다. 그 돈이 그 돈 아닌가!
돈 벌 일은 별로 없고, 모기지 이자는 숨통을 조여 오고, 주택은 적체되어 팔리지 않고, 렌트비는 여전히 강세를 부리고 있는 요즘, 뉴질랜드 정부의 대책이 아쉽다. 어떻게 경기를 부양할 것이며, 서민들의 주택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싶다.
나와 징한 인연을 맺었던 집, 정든 집, 추억이 서려 있는 집, 아이와 함께 커가고 나와 함께 늙어 가던 집, 철 따라 꽃이 피고 새가 둥지를 틀던 집 -- 그 집이 팔렸다고 사방에서 ‘축하’ 하는 일을 예전엔 알지 못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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