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 않네, 대롱대롱 매달린 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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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9/2011. 09:44
NZ코리아포스트 (202.♡.85.222)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뉴질랜드 최초의 수도였던 Russel의 원래 이름은 ‘korora reka’. 마오리어로 korora는 펭귄, reka는 맛있다,라는 뜻. 마오리 늙은 족장은 앓아누워서도 펭귄을 먹고싶어 했다는데, 아무리 먹을 것이 없었고 문명과 거리가 먼 시대였다해도 펭귄을 잡아먹는 행위는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펭귄은 사람보다 더 달콤하고 설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 펭귄 부부는 번갈아 알을 품는다. 아내가 알을 품을 때 남편은 바다로 나가 먹이를 잡아오고, 남편이 알을 품을 때는 아내가 먹이를 잡아온다. 부화를 기다리며, 발 위에 올려놓은 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다정하고 순한 누이 같은 그 새의 목을 비틀고 깃털을 뽑다니!
야만은 야만을 낳는다. 러셀은 야만의 바다였다. 1800년대 러셀은 바다 표범과 고래 잡이로 명성을 떨쳤다. 돈이 되는 일이니 각처에서 선원들이 몰려들었고, 거칠고 무례한 술주정뱅이들이 도처에서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했다. 러셀 바닷가는 술집과 매춘굴이 즐비했었고, 선교사들은 ‘사탄의 동굴’ ‘남태평양의 지옥’이라며 학을 떼었다.
수만 마리의 바다 표범과 고래를 모두 죽이고, 더 이상 야만적인 일을 저지를 건수가 사라진 러셀. 점차 개과천선의 길을 걸어서, 근래 Bay of Islands의 대표적 휴양지로 변모했다.
몇 가족이 러셀로 휴가를 떠났다. 러셀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동네였다. 바다는 쪽빛으로 투명하고, 햇살은 빛나고 구릿빛 남자들은 고기를 낚고,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뒹굴고, 아낙들은 다정하게 도란거렸다. 숭고한 꿈을 꾸기에 적합했다. 그런데 남자들이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왔고, 우리가 묵는 모텔 앞 마당은 어판장이 되어버렸다. 남자들은 고기들과 사이좋게 기념 사진(?)을 찍고, 회를 뜨고, 거나하게 마시고 즐기느라 분주했다. 여자들은 솥뚜껑 운전사 노릇을 계속 해야 했다. 도시를 버리고 떠나왔는데, 더 번잡하고 불순한 시간들이 내 앞에 벌어지다니---. 살육과 식탐의 시간들이 내가 길을 떠난 이유인가? 도대체 영문 모를 일이었다. 어쩜 러셀은, 손을 털긴 했지만, 음험한 야만의 기운을 우리에게 불어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러셀의 주술에 걸려들어 답답하던 차에 나는 그 돌멩이를 만났다.
러셀 카페 거리는 바닷가를 바라보는 곳에 죽 늘어서 있다. 영국풍 집들은 자신들의 이마에 18**으로 시작되는 건축 년도들을 훈장처럼 붙이고 있다. 일 세기 넘게 버틴다는 것은 훈장을 받을만한 거지.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지난 세기 네가 한 짓을.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 그런데 저 남자는 내 카메라를 왜 저리 응시하는 거지? 꼭 자기가 피사체가 된 듯 폼을 잡는다. 난 단지 백 살도 넘은 사연을 피사체로 담고 싶을 뿐인데. 참 대책없는 남자라며 카메라 렌즈를 구석으로 돌렸다. 어느 카페 처마 밑에 메주덩어리처럼 매달려 있는 돌멩이가 보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Hanging above is an early Polynesian weather stone. The perfect weather indicator> 란다. 그러니까, 오래 전, 기상청이나 관상대가 없을 때 날씨를 알려주던 돌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가슴에는 헛헛한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A dry stone means - That it is not raining.
A wet stone means - That it is raining.
A shadow under the stone means - The sun is shining.
If the stone is swinging it means - That there is a strong wind blowing.
If the stone jumps up and down it means - That there is an earthquake.
If it is white on top believe it or not, It’s snowing.
내 영혼이 홍시처럼 발그레했던 날, 보송보송 말라있었지. 떡이 되게 취해, 필름이 끊겨 낯선 골목에 주저 앉아 울던 날, 슬픔을 타서 마신 술과 눈물로 푹 젖어 추웠지. 햇살 좋은 날에도 가슴 한 구석은 늘 서늘하게 그늘이 졌어. 줄이 끊어질까 무서웠던 강한 바람이 불던 날,멀미가 나도록 흔들렸지. 야생마를 탄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던 날도 기억해. 시고 떫은 일로 열 받친 날,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바보가 되었더니, 급 냉각된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더군, 믿거나 말거나.
나는 3Kg 남짓한 몸뚱이에 탯줄을 달고나와, 초라하고 쓸쓸한 처마 밑에 저 돌 만큼의 무게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대롱대롱 매달려서 살려줍쇼, 망나니 같은 생의 야만과 광기를 다독여가며 젖었다 말랐다, 흔들렸다, 날뛰었다, 얼었다, 녹았다 ----다시 눈물처럼 젖어들고, 도돌이를 평생 되풀이한 것이 아닌가.
아, 탯줄도 끊지 못한 야만의 생이여! 따지고보면 우리 생에 야만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러셀 어느 처마 밑, 잠들지 못하는 돌멩이 하나, 오늘도 우두커니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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