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죽을 놈의 낭만!? - 1. 겨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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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008. 12:02
뉴질랜드 코리아타임스 (123.♡.85.165)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하늘에 해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이번 겨울은 참으로 수상하다. 비가 두어 달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린다. 주택가 곳곳이 침수되어 대피 소동을 벌이고 폭풍우에 쓰러진 나무들이 도로를 떡 막고 STOP!, 비상사태임을 선포하고 있다.
지난 가을 심어 놓은 공원의 어린 나무들은 참수 당한 것처럼 댕강댕강 부러졌다. 나도 분명 무언가 응징 받을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죄책감에 그 부러진 나무들을 애도하며 두려워한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의 표현대로라면 '비는 두려움의 결정체'이며 구미호처럼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간교한 놈이며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는' 진저리나도록 눅눅한 놈이다.
겨울내내 비의 장막에 갇혀, 비의 감옥에 갇혀 내 죄가 무엇인지, 회개 보다는 곰곰 변명거리를 생각하면서 '백석'의 시를 읽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고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달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
화롯불의 사그라진 재 위에 글을 썼다 지우는 백석,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지웠다 하는 나, 그와 나는 한 방에서 눈물 핑 도는 눈을 마주 보았던 것이다.
비는 어느덧 '회한'이 되어버렸다. 비는 구질구질하고 천식, 관절염을 악화시키고 빨래거리만 잔뜩 만드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만에 하나 다행히도, 빛처럼 빨리 지나가서 꿈결처럼 느껴지는 청춘의 날들을 기억해낸다면, 그 때 비는 생애 최고의 낭만이었다. 비는 감로수였고 피부에 닿는 감촉은 청량하고 황홀했다. 비와 사랑하고 '빗줄기의 애무'를 즐겼던 시절---춘천 가는 기차, 첫 키스, 맑은 눈동자, 별, 꽃, 산, 바다, 산들바람, 꿈, 막걸리, 소주만 있다면 인생은 충분했다. 낭만은 사랑, 평화, 자유, 배려, 포용, 환희. 희망,꿈, 도전, 용기 등등을 품고 있다. 내가 낭만을 죽을 때까지,죽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낭만은 짧고, 생활은 지리멸렬, 무지무지 길고도 길 다. 일하고, 돈 벌고, 애 키우고, 세 끼 밥 먹고, 개미처럼 일 하고, 꼼쳐두었던 뭉칫돈 떼이고 --- 소처럼 일하고, 돈벌고---
이번 겨울, 완전 낭만 제로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수입은 줄었다. 폭풍우에 부러진 옆집 나무가 하필 우리집으로 고꾸라져서 물받이가 작살났다. 남편 차는 오른 쪽 헤드라이트가 깨져 애꾸눈이 되고 내 차는 열쇠를 비틀어 돌려도 시동이 안 걸리고 꺽꺽댄다. 가스 히터는 열 번쯤 눌러야 간신히 불이 붙곤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새어 나온 가스가 내 코로 들어가면 난 속이 미식거린다. 오랫동안 괜찮았던 사랑니는 왜 또 쿡쿡 쑤시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비 때문에 골프, 낚시도 못 가고 갇힌 남편은 아이처럼 마누라 치마폭을 맴돌며 세끼 식사는 물론 뭐 맛있는 군입정거리가 없는지 마누라 얼굴만 바라본다. 아, 이 말라 버린지 수십 년 된 듯한 오래된 우물 같은 겨울날이여!
뭔가 2% 부족한 폭폭한 삶을 달래 볼 심사로 LP판을 걸었다. 라벨의 '볼레로'. 나는 눈을 감고 유연하게 몸을 튕기며 춤추던 영화 속의 남자 댄서를 생각한다. 그의 섬세한 근육은 참 낭만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볼레로가 마구 비벼져서 난타 공연처럼 돼 버렸다. 남편은 '로마의 휴일'을 빌려 와서 끔찍하도록 깜찍한 여인 오드리 헵번의 일거수 일투족에 하하하하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웃는다. 남편의 로망 오드리 헵번! 그도 낭만을 찾아 헤매고 있구나!!!
'낭만'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상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는 자, 너무 형편없이 깨져 버려서 그로기 상태인데,무슨 얼어죽을 놈의 낭만이냐며 궁시렁거리는 당신 그리고 나, 시인 고은 선생의 준엄한 충고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자.
“낭만은 지상의 마지막까지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할 인간의 궁극적 심상인 것. 너의 일상에 낭만의 축제를 더하라. 나의 임종에 낭만이 남아 있을 것.”
그토록 낭만을 찾아 노력하고 방황했지만, 겨울이 다 가도록 '낭만'의 그림자도 엿볼 수 없었다. 호르몬이 부족하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낭만이 부족하면 인생이 암울해져서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사네 마네 서로 물어 뜯는다. 어느 날인가는 꿀병에 새까맣게 달라 붙은 끔찍한 개미들을 떼어 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늘엔 잿빛 구름이 빽빽하고 동산 너머는 검붉게 물들어 있다. 나는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해,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손으로 귀를 막고 잽싸게 도망치는 개미들에게, 남편에게 소리 나지 않는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사는 게 이게 뭐야아아아---?!”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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