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히터가 피식피식 푸헬헬 소리를 내다가 꺼져 버렸다. 하필 억수로 비가 쏟아지고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밤이었다.가난한 잡가(작가 아님)는 손, 발, 코가 시려웠다. 잡가는 비발디의 음악을 틀어 놓고 목에 가시 걸린 갈매기처럼 꺽꺽 울어 댔다. 추우면 왜 섭섭할까. 학생 때, 고단하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연탄불이 꺼져 내 방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없이 울었다. 세상이 내게 36.5도를 유지할 만큼의 온기도 관심도 보태주지 않는구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왕 눈물을 본 김에 할머니의 죽음, 박제가 되어버린 사랑, 두고 온 강아지를 생각하며 카타르시스를 즐길 무렵, 남편이 포부도 당당하게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놀라거나 좋아하거나, 내 반응을 더 크게 느끼고 싶을 때 남편은 말이 없어진다. 남편은 판토마임 마술사처럼 상자를 열었다. 환한 빛이 쏟아지자 에어리언 같은 놈이 고개를 쑥 빼고 더듬이를 세우고 기웃기웃, 당혹해 했다. 눈도 없는데 막 움직였다. 정말 SF 영화의 소품, 아니면 마술쇼였다.
“어머머머머, 맙소사! 너 어떻게 여기 온 거니?”
킹왕짱 소라, 남편은 와인과 소라의 궁합을 기대하며 흥분했고, 나는 내 귀를 덮고도 남을 너그러움에 달떴다. 쪽빛 바닷물이 뚝뚝 뜯기는 소라를 들어 올리는 순간, 껍질의 작은 숨구멍마다 싱싱한 생명이 피어올랐다. 깨달음은 찰나에 오는 것일까. 마술처럼, 모든 절망적이고 쓸쓸하고 메말랐던 풍경들이 파릇한 물이 올랐다. 어쩜 요런 모양일까? 온 몸을 나선형으로 말아 올리다가 풍덩 빠져도 될 만큼 큰 확이 되어 너울너울, 주름치마처럼 열려 있는 소라. 소라의 나선에는 조화와 미적 감각의 최고 정수인 1:1.618의 황금비율이 숨어 있다. 소라여, 아름다운 소라여!
소라와 사랑에 빠져서 소라 귀와 내 귀는 뽀뽀한다. 솨아아 솨아아---수십 번, 수백 번 귀에 대보아도 소라는 어김없이 속삭인다. 세상, 많은 소리 중에서 소라는 자신의 소리를 찾아 공명하고 있는 중이라고. 아하, 부처님 헤어스타일(?)을 일컫는 말이 나발(螺髮), 소라 모양이다. 사부대중과 항상 공명하기 위해서 소라를 머리 위에? 내 멋대로 해석해 놓고 감탄한다. 부처님의 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소라여, 어떡하면 잘 공명할 수 있지? 세상과 당신과 나는.
"비바람이 사납고 바다가 검게 용트림 하던 날, 고양이가 내게 왔어. 생선 훔치는 일, 생선 통조림이 역겨워졌다고. 펄떡이는 생선을 잡고 싶다고, 거미줄로 그물을 만들어서--- ."
그만! 명치 끝이 꽉 막히고 목이 메었다. 내겐 용기가 필요해!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이라고 시인은 표현했던가. 서러움이 크고 깊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를 시간도 없이 후둑후둑, 미련마저 털어 내고 쉽게 떨어지는 꽃. 동백은 겨우 내내 빗 속에서 피고 지고, 피고 졌다. 하필, 차가 들고 나는 길 위의 주검,꽃들은 짓이겨져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지는 모습마저 아름다워야 하거늘---. 나는 동백가지 몇 개를 잘라 유리 화병에 꽂았다. 가지를 충분히 물에 담가주면서, 혹 꽃이 필려나---, 미안하지만 피어 줬으면 좋겠다고, 너의 꿈과 낭만이 만개한 뒤엔 깨끗이 처치해 주겠노라고, 아름다움만 오래오래 기억하겠노라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동백이 피었다! 가지가 잘렸다고 살짝 삐쳐서 새초롬하게 꽃잎을 벌렸다. 잡다한 세파와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번뇌를 털어 낸 동백은 얼마나 자유롭고 홀가분한 모습인지. 빽빽한 노란 술과 꽃가루는 꿈처럼, 햇살처럼 포근하다.
고구마나 구워 먹어 볼까? 고구마가 다 그 모양이 그 모양인데 어라, 사람처럼 생긴 놈이 있다. 정수리에는 상모 돌리는 아이처럼 긴 끈이 한 가닥 늘어져 있다. 어찌하다가 흙 속에서 이런 모양으로 태어났을까. 혹시 이 고구마는 나를 보고 싶어하던 그 누가 아닐까? 우울하고 쓸쓸할 때 상모를 돌리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내게 온 건 아닐까? 그리운 사람들, 그리운 사람들과 나누었던 매혹적인 시간들. 오래도록 고구마를 보면서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쯤에서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사실 소라, 동백, 고구마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당혹스러웠다면 미안하다. 정말 잡스러운 년이라고 욕해도 좋다. 나는 세상의 바다를 향해 작살을 던졌다. 낭만을 사냥했다. 서투른 솜씨로 잡아 올린 것이 소라, 동백, 고구마였다. 어느 날인가는 돌멩이, 우산, 시계가 낚길 수도 있다. 물론 그것들은 피차간에 모르는 사이다. 손길 한 번 스친 적 없다. 낚시꾼의 작살에 우럭, 스내퍼, 존도리가 아무 관계없이 줄줄이 꿰어져 있는 것처럼.
혹여, 잘 낚았노라고 격려하는 이가 있다면 용기를 내어 대답하리라. 낭만 사냥 미끼는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 코가 시큰한 연민, 세상과 공명하는 가슴 뿐이라고. 정말이지 다른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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