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어? 헤어진 옛 애인이 전화를 걸어와 괜스레 안부를 물으면 여자는 '그저 그래' 라고 대답하는 샹송이 있다. 슬픔이 촉촉히 베어 있는 음성으로 노래와 대화가 몇 분간 이어지다가 '딸깍'하고 전화가 끊긴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가 먹먹해진다. 어디선가 또 사랑이 죽었구나. 그리고 인생은 다시 '그저그렇게'시작되는구나. 어차피 나와 관계 맺은 것들은 허상이며, 꿈이며 픽션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또 다른 길로 찾아 들어 또 다시 그저 그런 길을 걸어간다.
오매불망 그리던 길, 죽음 앞에서도 찾고 싶던 길, 지리산 섬진강변 십리 벚꽃길을 나는 걷고 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봄 같은 겨울날에 길섶에는 쑥이 돋아 있고, 공기는 풋풋했고 햇볕은 온화했다. 강줄기는 겨울 가뭄으로 둥글고 큰 바위들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나는 작은 배낭 하나 걸머지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그 길의 여기저기를 눈길로 애무하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뗀다.
생각해보라. 한 두 그루만 피어나도 눈부신 벚꽃, 그 몽환적인 벚꽃 길이 십리를 이어져 있다. 겨울이라 꽃도 없고 잎마저 떨어진 나목들---. 나무는 다가올 봄에 피어 올릴 수만 송이 꽃들을 자신의 핏 속에 키우고 있다. 그 꽃들이 툭툭 꽃망울을 터뜨리며 절정에 다다를 시간을 나는 미리 앞당겨 찬란함, 그 눈부신 시간 속에 서 있었다. 아! 꽃이 아니라도 나는 꽃을 느낀다. 나는 만개한 벚꽃 길을 걷고 있다.
바로 얼마 전, 나는 오클랜드에서 늑대처럼 내달렸는데 오늘은 양처럼 유순하고 벚꽃처럼 경쾌하다. 이럴 때 삶은 '그저 그런'것이 아니라 유쾌, 통쾌하고 짜릿해서 진저리쳐진다. 모처럼 온전히 나 혼자만에 몰입된 시간이다. 나는 탈옥한 빠비욘처럼 자유롭다.
쌍계사 가는 벚꽃 길은 화장실도 별나다. 남자 화장실은 '길상' 여자 화장실은 '서희'라는 명찰을 붙이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주인공들이 화장실 캐릭터로 자리잡고 있다니 좀 너무하다 싶었다. 하늘나라에서 박경리 선생이 화장실 냄새를 참지 못해 코를 움켜쥐고 있지나 않을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피식 웃는다. 혼자 걸으며 실실 웃는 여자, 미친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은 검은색으로 코팅이 되어 있었고 2, 3초 동안 나는 그 차 안에서 멋 있는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올 거라는 상상을 했다. 그 생각의 강렬함에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움찔 사로잡힌다.
드디어 차 문이 열리고 웬 살집 좋은 여자가 내렸다. 내 앞에 놓여 있던 상상의 스크린은 와장창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젯밤 하동에 도착해서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들렀던 양품점 주인이다. 차 안에 있던 세 명의 여자들도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양품점에 마실 나와 있던 그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어젯밤 처음 본 나에게 감도 깎아 주고 귤도 까 주고 춥다고 발을 넣으라고 양품점 온돌방 이불섶을 들춰 주었다. 아침에 모여서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에 나를 발견하고 차를 돌려 세운 것이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말에 바쁜 일도 없는 나는 흔쾌히 차에 올라탔다.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사람의 정을 듬뿍 받으며, 너무 행복해서 얼떨떨해 있었다. 곤이 언니네 집에서 밥 먹고, 연이 언니 집에서 차 마시고 희야 언니 집에선 단감을 먹고 놀았다. Y 식당의 이모는 아침에 깬 나를 보자 마죽을 한 컵 타 주면서, 돌아다니다가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라고, 소박하게 꾸민 빈방이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 여자들---주름지고 군살 붙은 그녀들은 어찌나 인정스럽고 맑고 환하고 향긋한지 ---
연이 언니는 지난 해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데,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이 지리산을 울린다. 12세 때 처음 뇌출혈이 시작돼 세 번이나 뇌수술을 받은 연이 언니는 몸에 장애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폐암까지 찾아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벚꽃처럼 찬란하게 웃는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인생은 '그저 그런'것이 아니라 '찬란한'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핏줄 속의 피톨이 열정적으로 사랑한 지리산 섬진강 휘돌아 가는 길, 벚나무 길에서, 뽑기에서 연달아 서너 번이나 인형이 딸려 나오는 행운을 만났다. 못난이 뚱땡이 그녀들, 후후후---.
길을 나서니 하루는 참 길고, 인연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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