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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08. 17:21 뉴질랜드 코리아타임스 (124.♡.145.221)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나는 지리산 골짜기로 토꼈습니다. 비속어를 사용해 죄송하지만 가끔은 비속어 한 마디에 내 영혼이 카페인이라도 들이킨 듯 반짝 빛납니다.
내 방 앞을 흐르는 강물은 이쪽 산과 저쪽 산을 뚝 갈라 놓습니다. 나는 방문을 열고 강물 저 편을 바라봅니다. 내가 짊어졌던 번뇌, 노여움,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레테의 강을 건넌 이처럼 나는 이편에서 바보처럼 실실 웃습니다. 너무 홀가분해서 내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애매모호해 졌습니다. 내 방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가늘게 흐르는 강줄기와 누렇게 쇤 갈대를 보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햇볕이 갈대 위에 하얗게 무연(無然)히 부서져 내려서, 강 건너 내려놓은 나의 번민이 가지 않고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내 영혼이 독하질 못해서---
윤동주의 '자화상'처럼 우물 속에 가여운 내가 나를 빤히 보듯이, 강 건너에서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번뇌는 또 다른 나였습니다. 산골짜기에 쳐 박혀 있다고 번뇌가 쉽게 날 포기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그래도 강 건너 번뇌는 많이 순해졌습니다. 활화산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용암처럼 붉게 부글부글 끓던 번뇌는 서서히 사화산이 되어 잿빛 준엄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네요. 한 번만 눈 감아 주시면 안되나요? 애원하지만, 운명은 힘들다고, 아프다고 봐주는 법이 없지요.
누가 인간들의 폭력성을 성토하나요? 그 폭력적 가학성을 인간은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운명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닐른지요. 낭떠러지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등 떠밀어 도와주는 친절함에 정말 진저리가 나지 않습니까? 운명의 얄궂음을 물리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힘들어 할 때 나는 더욱 얄궂은 운명의 덫에 걸린 이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지친 영혼을 추스립니다.
참, 그러고 보니 며칠째 연이 언니에게 못 가 봤네요. 오늘은 항암 주사를 맞고 와서 꼼짝 못하고 골방에 누워 있는 연이 언니에게 가 봐야겠습니다. 산길을 걸어가야 하니까 옷을 든든히 입어야지요.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떠날 때 엄마가 챙겨 주신 빨간 내복은 목이 죽 늘어나 있습니다. 그 핏빛 빛깔이 엄마의 허무함, 슬픔, 병약함과 꼭 같아서 나는 슬픔이 복받칩니다.
겨울 들길을 따라 갈대밭을 지나 계곡을 거슬러 가면서 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 구성지게 뽑다가 강물이 여울지는 소리를 들으며 '개여울'을 부릅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날마다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 --- 감정은 풍부한 데 목소리가 영 안 따라주는군. 나이를 먹어 가면서 혼자 씨부렁거리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웃고 우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내 노래가 좋아서였는지 발 소리에 놀랐는지 둑방 밑에서 새들이 수 백 마리 뛰쳐나와 갈대밭으로 숨어듭니다. 뭔 새가 개구리같이 튀네?
연이 언니네 집에서 나는 원고를 쓰고 언니는 붓글씨를 씁니다. 오른 손이 불편한 언니는 왼손으로도 그럴 듯한 획을 만들어 냅니다.
"잘 되네! 오늘 왜 이리 잘되노?"
"내가 와서 그렇지? ㅋㅋ "
언니는 CD 플레이어를 내 귀에 꽂아 주고 나는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를 들으며 글을 씁니다.
해가 지기 전에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섭니다. 계곡은 물이 다 말라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목을 쭉 내밀고 한 참 내려봐야 계곡 바닥으로 내 눈길이 닿습니다. 솟아오른 산 만큼이나 깊은 지리산 계곡, 나의 고독의 심연도 그처럼 깊습니다. 깊은 만큼 나는 명징해집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자 산길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금세 사위는 먹물 속에 잠긴 듯 합니다. 또르륵 또르륵 소리가 요란하길래 뒤 돌아보니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돌돌 셈베이 과자처럼 말린 낙엽입니다. 내가 서면 멈추고 내가 가면 또르륵 몸을 굴리며 따라옵니다. 나와 질긴 인연을 한 번 맺어 보고 싶나 봅니다.
산 골짜기마다 불빛이 반짝반짝 켜졌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처럼 보석처럼 밝고 따스하고 아련히 빛납니다. 노래 한 줄기가 유성처럼 내 마음을 가로지르고 지나갑니다. --- 아득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그리운 내 아들 돌아올 날 늙으신 어머님 기도해 산골짝에 황혼이 질 때 꿈마다 그리는 나의 집 희미한 불빛은 정다웁게 외로운 내 발길 비추네---
세모(歲暮)에 나는 축복같은 따스한 불빛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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