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자신이 꾸었던 꿈을 소재로 '꿈(こんな 夢を 見た)'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8편의 단편 영화로 이루어진 '꿈'은 저마다 인상적인데,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반추되는 것은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다.
반 고흐의 그림 전시장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그림 앞을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화폭 속으로 쑥 들어간다(나는 움찔했고), 그림은 실사가 되어 움직인다(구로자와의 천재성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아를 지방의 돌 다리 위로 마차가 지나가고, 다리 아래에서는 빨래하는 아낙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반 고흐라는 사람을 만나려면---?”
“다리 건너 들녘으로 가보슈.”
‘고흐는 미쳤어. 조심해야 될거유’라며 깔깔거리는 아낙들을 뒤로 하고 남자는 고흐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맨다. 마침내 남자는 고흐를 발견한다. 고흐는 황금빛이 실크 타래처럼 풀어져 내리는 들판에 서서 안절부절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조금 밖에 안 남았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은 짧고, 중천에서 미끄러져 내려 산 밑으로 툭 빠져 버리는 시간은 더없이 짧다는 것을 고흐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난 망아지처럼 들판을 겅중거렸다. 성스러운 태양의 황금빛이 너무 빨리 사그라져서 화가 난 고흐, 잡아 둘 수도 없는 태양 때문에 하늘에 대고 핏대를 올리는 고흐. 그가 화폭에 태양의 가닥들을 꿈틀꿈틀 잡아 놓은 것은 다름 아닌 가장 좋은 시간들, 꿈 같은 시간들을 끈적한 물감 속에라도 가둬 두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의 평균 수명이 90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지만, 90세를 산들 여한없이 '충분한 시간'일까? 2백살을 살아도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생명의 유한성은 항상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하므로. 그렇다고 알 수도 없는 억겁의 세월 동안 영생한다면? 하루살이가 백년을 사는 것 만큼이나 우리의 존재가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지난 주말, U씨는 정원에 핀 '상사화(相思花)'를 꺾어 손수 꽃다발을 만들어 내 코 밑에 들이 밀었다. 잎이 다 지고 난 다음 대궁이 올라오고 외롭게 꽃이 피어난다는 상사화. 상사화의 향기는 달콤 쌉싸름하다. 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달큰한 향내를 피워야겠지만, 사랑의 쓸쓸함을, 인생의 쓴 맛을 아는 터라 상사화는 쓴 내음을 어쩌지 못하고 게워내고 있다. 꽃을 뜯어 먹어보진 않았다. 달콤 쌉싸름한 것은 미각이지 후각이 아니지 않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에겐 이렇게 어쭙잖은 변명을 드리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인체의 오감이 서로 합쳐져서 공감각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라고. 언제부터인가 코로도 맛이, 맛으로도 슬픔이, 눈으로도 소리가 느껴지고, 귀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때는 오감(五感)의 고유한 역할이 함께 뭉뚱그려져 내 몸의 기(氣)와 변죽이 맞아 한꺼번에 폭발해버릴 때도 있다.
우주의 섭리와 기가 한꺼번에 느껴지는 그 시간에, 고흐는 귀를 잘랐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본질로 들어가면 가해자는 '시간'이라고 나는 심증을 굳힌다. 고흐는 그림에 자신의 생명줄을 걸어놓고 후회할 시간 조차도 아까워 붓질만 해댔다. 어쩌다가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아앙-, 시간이 없다!' 울었다.
상사화를 식탁에서 거실로, 화장실로 옮겨 놓으면서 나는 조바심을 냈다. 상사화가 향기를 피우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태양이 이즈러질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고흐처럼. 3,4일만에 상사화는 시들어 갔다. 물을 매일 갈아주었는데도 너무 빨리---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상사화, 그 향기---.
고흐는 살아 생전 800여편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을 그렸다. 그러나 살아 생전, 단 한편의 그림만이(ㅠㅠ) 4백 프랑에 팔렸다. 그림은 맘대로 되지 않고, 기왕 그린 그림은 창고에 처박혀 있고, 가난과 절망은 찰거머리처럼 늘어 붙고, 여자들은 속을 썩이다가 떠나고, 시간은 고문관처럼 고흐를 옥죄어 왔다. 그래도 고흐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다시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살기가 폭폭해서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는 요즘. 어렵다 어렵다 한들 고흐만 하겠는가?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태양의 성스러운 황금색은 잠시 후에 사라지므로.
절망과 후회의 시간 마저 아까워하던 고흐는 37세의 어느날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쏘았다. 심장박동도 시간도 태양도 모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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