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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008. 12:24 KoreaTimes ()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기차가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던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보따리를 이고 들고 앞장섰고, 나는 무섬증에 솜털이 보소송 일어나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사위는 먹물 같았지만, 눈이 내린 길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철둑길을 한참 걷다가 논둑길로 들어섰다. 나는 미끄러져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졌다. 할머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자우뚱자우뚱 태엽 감긴 인형처럼 걸어갔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논두렁을 기어올라 할머니를 따라잡았다. 굴러 떨어졌다 기어오르기를 수 차례, 온 몸이 눈투성이가 된 예닐곱 살 나는 눈사람처럼 커져서 할머니를 쫓았고, 귀가 먹은 할머니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깜깜한 밤길을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며 걷는 것이 인생이었고 그 날 밤은 서막에 불과했다.
장날, 할머니는 닭을 옆구리에 끼고 보따리를 이고 지고 십리 넘게 걸어 장엘 갔다. 할머니는 항상 짐이 많아서 내 손을 잡아 줄 수가 없었다. 철로길을 걷다가 기적 소리가 나자 할머니와 동네 아줌마들은 철길 옆으로 황급히 비켜 서로 껴안고 주저앉았다. 나는 멀건히 서 있었다. 위험했다.검불처럼 기차바퀴에 빨려 들어가 죽을 수도 있었다. 얼마 전 아이 하나가 그렇게 죽었다고 했다. 속절없는 인생이었다.
이모네 집은 이십리쯤 걸어갔었다. 겨울이었지만 땀이 배어 나왔다. 논두렁가에서 쉬면서 할머니와 나는 눈을 뭉쳐 한 움큼씩 먹었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니 멀리 이모네 집이 보였다. 산도 들도 나무도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서 그 위로 청명한 겨울 햇살이 빛났다. 세상은 아득했고 반짝거렸으며 나는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웃 마을에 누가 죽었다. 부영 언니가 윗마을로 시집을 갔다. 나와 할머니는 또 십리 이십리 길을 걸었다. 상가에서 '에고에고' 억지로 곡소리를 내는 상주들이 내겐 미스터리였다. 부영 언니가 연지곤지를 찍고 방에 얌전히 앉아 있던 모습은 애잔했다.
걷고 또 걷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걸으면서 할머니와 기웃기웃 엿본 삶은 고달팠고 슬픔이 깃 들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산길을 걷는 것이 좋았다. 열 시간도 넘게 겨울 눈산을 올랐다가 내려올 때는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미끄럼을 탔다. 산 아래 온천에는 따뜻한 물이 샘솟았다. 정신은 산 씻김으로 말갛게 개었고, 몸은 온천물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터럭 만큼도 나를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사라져 자연 속에 섞여 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끔 그 '공(空)'이며 '무위(無爲) 의 위(爲)'였던 상태가 그립다.
하여, 나는 속상해도 걷고 스트레스가 목 밑까지 차 올라도 걷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도 걷는다. 걷다보면 내 몸 속에 살고 있던 괴물들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조국의 봄날, 산수유와 매화가 지천으로 흩날리는 섬진강변 지리산 자락을 내 품에 가득 안고 걷고 싶다. 지리산을 안을 수 없다면 별수없이 뉴질랜드의 가을을 안고 뒹굴어야지---. 나는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신고 집 앞 공원으로 나간다. 공원 잔디가 상큼하게 잘려 있다. 내 발 아래 폭신함, 누가 내 발걸음마다 고급 양탄자를 깔아 이렇듯 호강시켜 줄 것인가. 칼라 프린터 광고에 나옴직한 초록과 빨강,원색의 앵무새도 날아다닌다. 아마 삼각 관계인 듯 세 마리가 꺅꺅거리며 쫓고 쫓는다. 쟁탈전이 얼마나 치열한 지 허공과 나무갈피마다 불이 붙는 듯 하다.
풀섶에서는 풀벌레들이 가을을 노래하고,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매미들이 쓰르르쓰르르 애타게 여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한다. 도랑가 풀 위에는 곤충의 알집이 하얗게 피어 있다. 무사히 2세들이 태어나길 기대하는 마음-누가 곤충을 미물이라 했는가!
두 줄로 나란히 소나무가 서 있는 길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바람이 자고 있는 날에도 그 길에서는 바람이 불었다.솔바람 길, 소나무 길에 가면 바람이 내 몸을 포옹하듯 감쌌다가 풀어 준다. 나는 몇 번이나 그 길을 왔다갔다 한다.잔디밭에 숨어 있는 쌍둥이 하얀 버섯이 눈사람 같다. 아님 애인, 부모 자식인지 꼭 붙어 있다.
고슴도치의 주검도 보았다. 새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것인지, 해로운 먹이를 먹고 죽은 것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걷다보면 사물은 어떤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래서 바라보노라면 사물의 이치가 어렴풋이 깨달아진다. 격물치지(格物致知)다. 만물의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곧 이어 한줄기 바람이 이마와 목덜미로 스쳐 지나간다. 나는 나무이고 앵무새이고 풀벌레이고 바람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