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집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팔고 다닐 때였다. Open home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어느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마당 한쪽에 붉은 열매를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나무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과나 감처럼 가지에 꽃받침이 붙어서 열매가 맺힌 것이 아니라 체리처럼 가는 선들이 소복이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나무는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져 내리는 불꽃놀이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축복'이라는 불꽃을 흠뻑 뒤집어쓴 듯 했다.
그 나무의 이름은 타마릴로였다. 독거미 이름 같았다! 내 집 정원에 노랑과 빨강, 두 그루의 타마릴로를 심은 것은 '열정적인 사랑이 지나쳐 축복이 되어 버린' 그 색과 모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두 어 달 전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한 타마릴로. 처음엔 초록이었다가 노랑은 노랗게 빨강은 빨갛게 익어간다. 아, 지금 타마릴로는 익어가고 있고 나는 뭔가 언짢았던 일이 헤질헤질 풀어지고 있다.
이민와서 생소했던 것 중 한가지가 피조아, 포우포우, 타마릴로 등의 과일이었다. 어떻게 먹어야 할지 맛이 어떨지 몰라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행복한 이민 생활을 위해 생소한 것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은 필수.
타마릴로의 원래 이름은 'tree tomato'. 감자나 토마토, 고추처럼 남미가 원산지이다. 1800년대 후반 뉴질랜드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그 때는 노랑과 보라 두 종류였다. 1920년대, 뉴질랜드 종묘업자가 씨앗을 개량해 붉은 색을 만들었다고. 타마릴로라는 이름은 NZ TreeTomato Promotions Council의 Mr. W. Thompson이 붙인 것. 'tama'는 마오리 말로 'leadership' 이라는 뜻. '-rillo'는 스페인어의 Amarillo(노란색)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rill'이라는 단어는 '작은 내, 실개천,시내처럼 흐르다' 의 뜻. 그러고 보니 타마릴로 가지가 실개천같다! 강물처럼, 인생처럼 구비구비 흐르는 나무, 졸졸졸 시내 소리가 들리는 나무, 타마릴로!!!
타마릴로의 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2차 대전 발발 직후. 전쟁으로 바나나 파인애플 오렌지 등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비타민 C 섭취원으로 대체 과일을 찾게 된 것. 생산량 증가는 1970년대 뉴질랜드의 'horticultural boom(원예붐)' 시절.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전문시스템에 의해 질병 등이 관리되고 있다.
타마릴로는 단맛이 거의 없어 새들도 파먹지 않는다. 게다가 미끈거리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타마릴로는 맛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가게에서 산 타마릴로는 살짝 삶아 놓은 것처럼 맛이 떨어진다. 뉴질랜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은 과일 보관과 유통 문제다. 설익었을 때 따서 유통과정 중에 익히거나, 몇 달씩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다. 내 집 타마릴로는 음---둘이 먹다가 상대방 몫까지 호시탐탐 노리게 되는 그런 맛이다.
타마릴로가 바람에 하나 둘 떨어졌다. 올해 타마릴로 맛이 어떨까 시식해보기로 한다. 거름을 잘 주느냐, 또 어떤 거름을 주었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 특별히 음식물과 한약 찌꺼기 잔디 깎은 것 등을 듬뿍 올려 주었는데---. 횡으로 반을 딱 자르면 검붉은 씨앗과 과육이 콩팥 모양으로 빛난다. 수저로 동그랗게 파내 한입 쏙 넣어 보니, 비릿하면서 간간하기도 하고 풋내 나는 토마토 향 같은 풍미가 훅 끼친다.
타마릴로는 독특한 맛과 향 때문에 대중적이지는 않지만,매니아층에서는 꽤 인기를 얻고 있다. 붉은 빛 타마릴로 색소를 이용한 천연 립크림도 출시되었고, 타마릴로 향이 진한 Pencarrow Sauvignon Blanc 와인도 선보이고 있다.무엇보다 비타민 C가 풍부하고 달지 않아 건강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타마릴로 맛있게 먹는 법>1. 잘 익은 타마릴로의 속을 파내 브랜더에 넣고 요거트와 꿀을 넣어 살짝 돌린다.
2.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섞어 먹는다.
3. 피자 토핑으로 사용한다.
4. 올리브 오일과 베질 등 허브를 섞어 소스를 만든다. 야채 생선 육류 등에 사용.
5. 제대로 익은 타마릴로를 반으로 딱 잘라 수저로 야금야 금 파먹는다.
타마릴로는 토마토의 아류쯤으로 이름도 없이 취급되다가,1967년 뉴질랜드 농림부의 공식 발표로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된다. 타마릴로는 뉴질랜드에 온지 70여 년 만에 제 이름을 얻었고, 한 세기가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조금씩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더욱 붉게 익어가는 타마릴로를 보면서 이민 동지로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우리도 한 세기는 꿋꿋이 버텨 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