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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07. 10:11 KoreaTimes ()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Y가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7년 전이었다. 녀석을 처음 봤을 때 Y는 마음이 여간 설레지 않았다. 순백의 윤기 자르르 흐르는 피부하며 아담한 몸집이 너무 맘에 들었다. Y는 몇 차례나 녀석의 앞을 기웃거리며 곁눈질을 했다. 녀석의 출신지도 맘에 들었다. 유명한 W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은 하반신이 튼실해 아래쪽에 꽁꽁 얼린 고기나 낚시터에서 잡아 온 생선 등을 잘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Y는 녀석에게 부엌의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녀석의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플라스틱 냄새가 조금 떠도는 것 같아 숯을 한 토막 겨드랑이에 찔러 넣어 주었다. 행여 김치국물이 묻거나 야채에서 더러운 흙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봐 녀석의 갈피마다 키친 타월을 얌전히 접어 대주었다.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녀석이 지리해 할까 봐 앙증맞은 자석 고양이 다섯 마리를 녀석의 앞섶에 붙여 주었다. 머리 위에는 녀석의 품격과 잘 어울리는 도자기를 올려 놓았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이었다. Y는 밤늦도록 두 팔을 벌려 녀석을 안아 보기도 하고 뜨거운 숨결을 녀석에게 후우- 불어대기도 했다. 녀석이 허전해 하면 Y는 우유며 주스, 치즈, 계란, 야채 등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살짝 녀석에게 들여놓기도 했다. 나란히 열 맞추고 색깔도 맞춰 넣어 준 세간살이를 녀석은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Y는 하루에도 수십 번 녀석과 눈을 맞췄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녀석을 바라보고 ‘안녕’ 인사하면, 녀석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Y가 물을 마시기 위해 한 밤중에 녀석에게 가면 녀석은 어둠 속에서 희뿌염하게 기지개를 켜며 반가워했다. 녀석과 Y는 행복했다. 어쩌다가 이제서야 만났는지 일분 일초가 아까웠다.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갔다. 녀석의 피부는 점차 윤기를 잃어갔다. 앞섶은 각종 메모 쪼가리에 고지서 등으로 누더기질이 되어 있었다. 머리 위에 올려 놓았던 도자기는 간데 없고 그 곳에는 계란 판대기와 먼지가 나뒹굴었다. 세간살이는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서 녀석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녀석이 헉헉대건 말건, Y는 녀석의 속이 너무 좁고, 하반신은 돌덩이처럼 무거워 물건을 꺼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불평을 쏟아 냈다. 녀석의 여기저기는 반찬 국물이 피처럼 얼룩져 있었다. 녀석의 피부는 축 늘어져서 녀석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차가운 숨결이 그 틈새로 빠져나갔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었니?”
Y는 녀석의 늘어진 피부를 따귀를 치듯이 올려 붙이며 쌀쌀맞게 말했다. 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Y를 위해 한 번도 쉬지 않고 7년 동안 살아왔다. 뭐가 그리 바쁜지 Y는 다정한 눈길 한 번 안주고 위로의 손길 한 번 안 뻗쳤다. 녀석은 허구 헌날 한쪽 귀퉁이에 쳐박혀 외롭게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슬퍼서 소리죽여 우는 날이 많아졌다. 몸도 여기저기 이상이 생긴 듯 했다. 그래도 Y가 다가오면 예전처럼 행복해지고 싶어 녀석은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짓고, 아픈 신음과 울음을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Y는 녀석의 바로 코 앞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며 광고전단지를 요모조모 살피고 있었다. 전단지의 갈피를 홱 넘기는 순간 녀석은 숨이 멎을 번 했다. Y는 녀석의 예전 모습보다 훨씬 근사하고 체격도 좋은 놈들에게 푹 빠져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녀석의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신음과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Y는 사람들에게 녀석의 흉을 보았다.
“물이 졸졸 흐르다가 갑자기 딱 끊기기도 하고 가는 비명소리처럼 조그맣게 흐느끼기도 하다가 음계가 불안한 피리 소리도 낸다. 딱 전설의 고향 같아.” Y는 아예 녀석의 곁에 오지도 않고 새로 올 후임자만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더 이상 Y에게 해줄 일이 없어. 나는 이제 쉬고 싶어. ’녀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숨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