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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학생이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케스트라에서도 중책을 맡았고 학생회 임원이기도 했으니까요. 왠만큼 좋은 머리와 성품이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와의 수업이 원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A에게는 수업 때 마다 공부할 부분을 스스로 정하려하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선생님. 오늘은 thermal physics의 heat transfer 부분을 공부하면 좋겠어요. 내용을 좀 훑어봤는데 그 부분이 재미있어 보이더라구요’
‘음.. 그 부분을 공부하려면 그 앞의 두가지 컨셉을 먼저 공부해야 해.’
‘꼭 그래야 할까요? 그냥 공식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도 될거 같은데요’
하는 식의 대화를 수도 없이 했으니 말이지요.
좋게 말하면 자의식이 강한거고 나쁘게 말하면 교만한 것이겠습니다만 다행히도 학교 성적은 꽤 좋은편이었지요. 이전에도 가끔씩 그런 학생들을 만나왔었고 또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니, 좋은 성적을 잘 유지해주기만 한다면 입시결과도 나쁘지 않을 아이에게 제가 굳이 하나하나 감놔라 배놔라 따지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고 그에 연관된 사례들을 소개해서 지식의 폭을 넓혀주는 일에만 집중하면 됐으니까요. 물론 그것도 A의 윤허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만.. ㅎㅎ
그런데..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A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대학입시를 위해 가장 중요한 13학년 External에서 A는 자신이 받아본 중 최저의 점수를 받고 맙니다. A가 희망하던 학과에서 불합격했음은 물론이고 소위 ‘보험’이라 일컫는, 아무리 안되도 여기는 합격한다.. 싶은 지원학과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NCEA 시험의 문제유형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수험생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일것이니 A의 참담한 성적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많이 생각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책임감을 동반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다음해 2월이 되어 전년 시험문제가 NZQA 사이트에 기출문제로 공지된 후에야 얻을수 있었습니다.
제가 전과목 문제들을 다 분석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니 모든 과목을 통털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제가 가르쳤던 두가지 과목의 문제들 만큼은 충분히 분석해 낼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시험문제들은 마치 미리 짜고서 만든 것처럼 A의 약점들을 조목조목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A가 특별히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챕터들.. A가 자주 실수를 해서 제가 계속 반복시키는 바람에 갈등만 커졌던 그런 부분들.. A가 입버릇처럼 그건 다 알아요~ 라고 말했었지만 정작 시험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는 잊어버렸다며 허둥대던 그 concept들.. 새로운 형태로 구성된 시험문제들이 그 모든 A의 약점들을 실랄하게 파헤치고 남김없이 무너뜨린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후회스러웠습니다. 아무리 멋대로 삐쳐나가는 아이라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확실히 잡아주었어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나름 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가장 중요한 시험준비의 ‘전략’을 저 혼자서 결정하게 했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그럼 도대체 A는 어떤 방식으로 시험준비를 했던 것일가요? 과연 그것은 보통의 학생들과는 다른 유별난 방법이었을까요? A가 저지른 실수를 우리의 아이들이 되풀이 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모든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며 저지르기 쉬운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과목별, 챕터별로 경중을 따져서 투자하는 시간이나 노력을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일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과목이 있고 싫어하는 과목이 있습니다. 쉽게 쉽게 문제가 풀려나가는 챕터가 있고 한 문제를 붙잡고 몇시간을 끙끙대도 남는 것은 지끈거리는 골치뿐인 챕터도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이고 학생들도 사람이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문제가 풀리지 않고 점수가 나오지 않는데도 그저 재미있고 좋아하는 과목은 존재하지 않고, 손만 대면 문제가 술술 풀려나가고 멍하니 앉아서 듣기만 해도 쏙쏙 이해가 되는 챕터를 징그러울 정도로 싫어하는 경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좋아하면 잘하게 되고 싫어하면 못하게 되서 그런걸까요? 아닙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잘하는 과목을 좋아합니다.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과 챕터를 좋아하고 그 과목의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적성이나 타고난 재능에 의해 과목의 선호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과목의 성적에 정비례해서 과목의 선호도는 결정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지요.
하여튼.. 시험 준비에 들어갈 무렵, 아이들은 연말 점수를 가늠해보며 나름 계산을 시작합니다.
이 과목은 열심히 해 봤자 몇 점 안나오니까 그저 시간낭비.. OK.. 그냥 버리고...
이 과목은 최소한 몇점이니까 무조건 몰빵해서 전체 점수를 올리고...
이 챕터는 요 몇년 통 시험에 나온적이 없으니까 그냥 가볍게 개념정리만 하고..
이 문제유형은 뭐 내가 잘하는거니까 아예 뿌리를 뽑아야지.. 전략과목!!
물론 말이 됩니다. 저도 NCEA 학생들이 Y13에 올라갈 때면 선택한 과목들의 챕터별 Credit를 하나하나 계산해가며 버릴 챕터와 살릴 챕터를 선별해주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입시 필요점수인 80credit를 훨씬 상회하도록 넉넉한 여유를 두고서 작업을 하는 것이니 위와같은 아이들의 계산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의 점수계산과 학습계획은 자기가 잘하는 과목, 그러니까 좋아하는 과목과 챕터에만 치중해서 시간을 배정하고 목표를 설정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들 스스로가 판단하는 ‘잘함’과 ‘못함’은 결국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또 다른 표현인데, 시험문제의 난이도라는 것이 한 학생의 개인적 선호와 딱 맞춰서 결정되지는 않기에 둘 사이에는 심각한 어긋남이 발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다시말해서 학생이 좋아라하고 성적도 잘 나오던 부분의 문제가 너무 어렵게 출제되거나 아예 출제가 안될 수도 있고, 학생이 멀리하고 싶어하는 문제가 보너스 문제형식으로 쉽게 출제가 되어서 자기만 빼놓고 남들은 다 득점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런일이 벌어진다면 아이들의 대표적인 핑계인 ‘공부한 곳에선 하나도 안 나오고 안한데서만 출제됐다’가 아주 심각한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A가 겪었던 어려움이었습니다.
이제 단기적인 시험준비에 돌입해야 하는 9월을 맞으며 우리의 아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자세는 전과목, 전챕터에 대한 차별없는 ‘사랑’ 입니다. 저득점의 골을 메워서 평균을 올려야 할지, 아니면 고득점의 산을 높여서 평균을 올려야 할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방법이니만큼 당연히 과목별, 챕터별 경중을 두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공부에서 배제하는 과목이 있다거나 아니면 하루종일 한 과목만 붙들고 있는 누를 범해선 안될 것입니다.
시험결과를 뚝 떨어트리는 ‘묘안’ 중에는 위의 ‘과목별 편식’ 뿐 아니라 ‘학습과정의 몰이해’ 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 K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제가 아이들을 한 두해 만나는 것도 아니고 연말시험 결과를 듣는 것 만해도 20년이 넘었는데 설마 상황판단을 못할까요..
‘그래서... 빨랑 얘기해. 몇 점이냐?’
두세번 다그치고 나서야 K는 마지못하는 목소리로 점수를 이야기 했습니다. 솔직히 너무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놀라는 목소리로 학생의 기를 죽일수는 없지요.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오히려 아직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서 짚어주며 희망을 품게 해야 합니다. 희망고문이라 하더라도 좋습니다. 적어도 고문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럼 성적이 A로 가기에는 조금 모자라네.. 아무래도 내년에 엄청 열심히 하던지 아니면 재시험을 치러야 할거 같다. 그래도 학교에 가서 성적을 자세히 알아봐봐. 혹시 문제 중에 실험 페이퍼 성적이 많이 안 좋아서 전체 성적이 떨어졌을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재시험을 안 보는게 나을수도 있으니까’
캠브리지 과정을 수강하는 K는 Y12 물리시험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저조한 성적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렇고 본인도 그렇고 아무리 안되도 A라며 낙관했었는데 정작 결과는 B range의 중간쯤이었지요. 캠브리지 시험은 Y12와 Y13 점수의 평균으로 최종점수를 계산하기 때문에 12학년 점수가 안 좋으면 13학년에서 너무 고생을 해야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고생을 해서 12학년의 부진을 만회할만큼 성적이 잘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더 양도 많고, 더 난이도가 높은 과정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캠브리지 과정은 12학년에서 점수를 만들어 놓아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았다면 13학년때 재시험을 치러야만 합니다. 참 많이도 복잡하지요. 그런데 과학과목엔 더 복잡한 부분이 있습니다. 과학과목의 시험문제는 세가지 문제지로 나뉘어집니다. 객관식과 주관식 그리고 실험이 그것입니다. 일년치 학습내용 전부를 객관식으로 한번 풀고 주관식으로 또 한번 풀고 거기에 더해 실험시험을 통해 조작능력과 필수지식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한 과목이 이정도이니 이런 방식으로 5과목의 시험을 치르고 나면 아이들이 초죽음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요.
K의 성적에 의구심을 품은 채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정말로 세개 페이퍼가 골고루 엉망이면 어찌하나.. 만약 실험만 문제가 된다면 재시험을 치러야하나 말아야 하나..
개학을 하고 y13으로 등교한 첫날, K는 일러준대로 선생님을 찾아서 Paper별 점수를 확인했고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제게 연락을 했습니다.
“쌤. 객관식은 A* 구요, 주관식은 A인데요.. 실험이 D예요. 히히히..”
다행히도 이론 베이스의 공부는 열심히 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게 기분이 좋았는지 아이는 제 속도 모르고 웃기까지 했습니다. 성적을 듣는 중에 ‘네가 진정 단매에 죽고싶은게냐?’ 하는 고전적인 욕지거리가 튀어나올뻔 했습니다. 캠브리지과정을 수강중인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지만 실험페이퍼의 비중은 무시해도 될만큼 가볍지 않습니다. 전체 점수의 28%가 실험점수 입니다. 더구나 학생들의 점수가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 양상이 강해서 A와 적은 수의 B, 그리고 C를 거른채 D로 연결되는 특이한 점수분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까딱 잘못했다가는 순식간에 A에서 D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캠브리지 과학 과목의 실험페이퍼인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이 상황을 누누히 말해주고 실험시험준비를 위해 문제도 풀리고 숙제도 주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실험 문제는 그리도 싫어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결과가 A*, A, D인 것이지요.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K는 재시험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실험점수만 낮은 경우엔 재시험을 치르는 것이 큰 개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그 노력으로 13학년 점수를 올리는 것에 치중하기로 한 것이지요. 다행히 작전이 잘 맞아 떨어져서 간당간당하게 최종점수 A를 받기는 했지만 고등학교의 마지막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버거운 일년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간혹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의 특색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알려줘도 관심조차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무조건 잠 안자고, 무조건 고득점을 외친다해도 과정의 이해가 없는 노력은 많은 경우 큰 골치거리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K가 경험했던 캠브리지 12학년 과학시험이 그렇습니다. 복잡한 설명이나 계산이 없다고 해서 실험페이퍼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지 않는다면 28%에 해당하는 점수를 놓칠수도 있고 설사 겨우 패스를 한다해도 재시험의 기회를 잡는 것 또한 여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캠브리지 12학년 AS과학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이 있다면 꼭 기억하세요. 만약 올해 실험페이퍼를 놓치면 내년에 지옥을 경험할 겁니다.
지금까지 두가지 사례를 들어 얼만 남지 않은 연말시험을 준비하는 방법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일들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음 기회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자신의 성향이나 수강과정의 특성을 몰라 괴로움을 겪는 일 없이 진학과 연말시험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거두어 들이는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