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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는 행위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나와 모든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오롯이 자각하는 순간이며, 음식에 담겨진 우주를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이는 숭고한 체험이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 우리는 계절을 온전히 살아내는 힘을 얻기도 한다. 대지의 양분과 햇빛, 공기, 비바람. 우주의 모든 순간들이 그 계절의 식재료를 키워낸 인연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얻은 제철 식재료에 정성을 더한 산사의 밥상이 현대인의 힐링푸드로 자리매김한 것도 자연스럽다. 겨울 초입, 사찰음식에 담긴 청정한 기운을 만나기 위해 예천 용문사를 찾았다.
내력 깊은 용문사 주먹밥, 죽, 비빔밥
예천 용문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용문사라는 사명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운무에 길을 잃어 이 곳에 들었을 때 청룡 두 마리가 길을 인도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윤장대(국보), 그리고 조선시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이 있는 왕실 사찰로 알려져 있다. 용문사는 사찰음식 특화사찰이기도 하다. 어느 사찰이든 ‘절밥’으로 지칭되는 음식이 있지만, 이곳의 사찰음식은 역사적 측면에서 조금 특별하다. 용문사는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마다 승병들의 보급기지로 기능한 호국사찰이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용문사 스님들은 경내 자운루에서 승병들을 위해 식량과 각종 보급품을 전달했다. 승병뿐 아니라 오랜 전쟁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주먹밥과 죽, 비빔밥을 만들어 구휼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당시 용문사 스님들이 만든 주먹밥과 죽, 비빔밥은 당시 수많은 승병과 백성들에게 부처님 자비의 상징으로 여겨졌을 터이다. 오늘날 용문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이들에게 가장 호응이 높은 공양간 음식이 ‘비빔밥’인 것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비빔밥은 용문사뿐 아니라 많은 사찰의 참배객들이 ‘절밥’ 중 첫손으로 꼽는 음식이다. 제철 자연에서 채취한 식재료의 다채로운 식감과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호불호가 적고, 많은 대중을 동시에 먹일 수 있다. 때문에 부처님오신날을 비롯해 대중이 운집하는 법회나 사찰 행사에서 비빔밥이 주된 음식으로 등장하곤 한다. 철마다 재료도 조금씩 달라진다. 봄에는 참나물, 유채나물 등 녹색채소가 주를 이루고 여름엔 애호박과 열무김치, 가을엔 각종 버섯류와 무생채, 겨울엔 말린 나물들이 주인공이 된다. 재배기술의 발전으로 식재료의 제철 구분이 다소 무의미해졌지만, 계절마다 자연에서 채취하는 재료들은 여전히 절집에서 활용도가 높다.
신기하게 입맛을 사로잡는 비빔밥의 힘
비빔밥을 떠올리며 용문사에 당도한 만큼, 첫 발걸음은 자연스레 공양간으로 향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첫 끼니는 저녁부터지만, 입소시간보다 좀 이르게 사찰에 당도한 덕에 이날 앞선 점심메뉴가 비빔밥이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후 2시경, 점심공양 시간이 한참 지난 공양간은 정갈하고 고요했다. 매끼 모든 음식을 새로 조리하고 냉장고에 묵히지 않는다는 원칙대로, 점심 메뉴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진 채였다. 대신 템플스테이 소감을 나누기 위해 공양간에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던 전 회 차 참가자들이 밝은 웃음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용문사 비빔밥, 전설의 메뉴는 얼마나 특별하고 맛있었을까. 비빔밥 후기를 수소문했다. 역사적인 의미가 더해졌다고 한들, 여느 사찰에서도 맛볼 수 있는 비빔밥일진대 예상외로 찬탄 일색이다.
“집에서도 비슷한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거든요? 용문사에서 먹은 비빔밥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데, 막상 먹으니 차원이 다른 느낌이랄까요? 그동안 절에서 먹어본 비빔밥 중에서도 최고였어요.”
“저는 고추장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맵지도 달지도 않으면서 감칠맛이 났어요. 고추장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게 아니라면, 단순한 비빔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잖아요? 비결이 화학조미료는 확실히 아니에요. 제가 화학조미료에 정말 민감하거든요.”
평범해 뵈는 비빔밥이 왜 이토록 맛이 있는지에 대해 토론이 이어지는 중에, 공양간 문이 열리고 공양주 대덕심(65) 보살이 등장했다. 저녁공양에 사용할 된장을 담기 위해 장독대로 향하려다, 비법을 묻는 질문과 칭찬들에 발이 묶인 채 뿌듯한 웃음꽃을 피워낸다.
가장 강력한 맛의 원천, 정성 그리고 수행
수줍은 미소로 응답한 공양주의 발길이 장독대로 향하자, 참가자들의 걸음도 자연스레 그를 따랐다. 용문사 밥이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려 대구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참가자들은 고추장 비법을 캐묻다가 갓 퍼낸 된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웃음이 퍼지자, 경내를 포행하던 스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동참했다.
“절집 밥상은 장맛과 정성이라고 하지요. 대중스님들의 일상식이자 수행을 위한 음식이기도 하니, 오신채와 조미료를 넣지 않는데도 참 맛이 있습니다. 스님들이야 공양마다 그 음식에 담긴 정성을 그대로 느끼니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그래서 가끔은 공양간에서 음식을 다루는 공양간 보살님들이 우리 스님들보다 더 치열한 수행을 하시는 게 아닌가 해요.”
오후 3시가 지나면서 전 회 차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떠난 빈자리는 새로운 참가자들이 채웠다. 방사에 짐을 푼 참가자들은, 경내 곳곳을 걷고 사진으로 남기며 순간을 만끽했다. 용문사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저녁 공양시간이었다.
먹거리 너머 발원의 견인차
용문사에서의 삼시세끼, 그토록 기다린 첫 끼였다. 메뉴는 숙주미나리무침과 우엉조림, 표고버섯장조림, 무채나물과 머윗대볶음, 양념깻잎 그리고 공양주의 특별 조리법으로 만든 미역토장국이다. 밥과 나물을 한 그릇에 담아 고추장 넣고 비빔밥으로도 먹을 수 있는 구성이지만, 하나하나 맛깔스러운 자태에 각각의 맛을 음미 해보기로 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다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진리를 실현코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합장한 채 오관게를 곱씹어봤다. 온 우주가 키워낸 이 음식을 먹고 나는 어떤 마음과 원력으로 살아야 할까.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내 삶과 나를 둘러싼 모든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발원을 새겼다. 젓가락 닿는 모든 음식이 정갈했다. 식재료 본연의 향과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간’은 군더더기 없이 담박했다. 한 입 한 입 맛에 집중했다. 우엉과 버섯, 머윗대와 미나리, 숙주 등을 키워낸 우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오기까지 더해진 정성과 손길들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나는 이 음식으로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따끈한 미역토장국 한 모금에, 한기로 움츠러든 몸이 녹아내렸다. 미역토장국은 용문사 공양간의 대표 음식이다. 된장을 소량 넣고 끓인 미역국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세간의 미역국이 고기나 생선 등의 고깃국물에 의존한다면, 토장국은 온전히 미역과 된장 두 가지 재료만으로 만들어 낸다. 국물을 내는 재료가 단 두 가지임에도, 그 맛은 더하거나 덜 필요없이 알맞았다. 간은 국간장 약간으로 맞춘다. 코로 된장의 향을 먼저 느끼고, 맛을 보면 입 안이 미역의 풍미로 가득했다. 그 향과 맛이 더없이 조화롭고 안정적이었다.
온전히 먹는다는 것의 행복에 대하여
사실 저녁공양을 준비하던 공양간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기도 했다. 용문사 아랫마을에서 사온 톳의 상태를 신중하게 살피던 공양주 수선화(78) 보살이 “신선도가 좋지 않다”며 기준 미달 판정을 내렸다. 즉각 저녁 공양 메뉴에서 톳나물무침이 제외됐다. 메뉴 하나 빠진 자리에는 이틀 전 별 생각 없이 꺾어 손질한 후 저온창고에 둔 머윗대가 등장했다.
“사찰음식은 조미료를 쓰지 않고 양념도 최소한으로 소금 간을 하는 정도로 만들어요. 그래서 식재료의 신선함이 중요합니다. 강한 양념을 하면 신선도가 좀 떨어지는 식재료도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선 안 돼요. 부처님과 사중스님들, 그리고 내 가족과 같은 대중들에게 공양하는 음식인 만큼 사찰 공양간은 마주하는 인연과 상황에 따라 가장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절 일은 절로 된다’ 는 말에 공양도 포함이 되는지, 계획했던 메뉴가 틀어져도 또 그 때마다 좋은 대안이 나오더라고요.”
평소의 저녁식사보다 적은 양을 먹었다. 그럼에도 심신은 만족스러웠다. 소소하고 담박한 반찬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면서, 온전히 먹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포만감에 앞서 마음에서부터 차오르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산사의 밤은 이르게 찾아왔다. 온기가 맴도는 방사에 누운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어둠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에 절로 눈이 떠졌다. 맑은 공기와 편안한 뱃속 덕인지 이른 시간에도 정신이 맑았다. 어스름한 새벽, 청량한 공기를 가르는 스님의 목탁 소리에 이끌려 보광명전으로 향했다. 템플스테이에 단체로 참가한 조계종 포교사단 경북지역단 중부총괄팀이 좌복마다 빼곡히 자리했다. 포교사들의 신심이 더 해진 장엄한 독경소리가 고요한 경내에 경건한 울림을 선사했다. 예불 등 의식 참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새벽예불을 특별한 경험으로 여겼다.
아침 6시 반, 호박죽을 공양 받았다. 늙은호박에 설탕 대신 단호박을 더해 자연스런 단맛을 냈다. 전날 미리 손질해 놓은 호박은 공양시간에 맞춰 조리를 시작해 푹 끓였다. 한 시간 이상 약불에서 타지 않게 정성껏 저은 후 불을 끈 채 10여 분 두는 기다림이 있어야 재료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 공양간 보살님들의 비법 아닌 비법이다. 호박죽은 뜨겁고 신선했다. 간을 하지 않아도 달고 풍부한 맛이었다. 반찬은 오이와 무를 함께 버무린 생채 하나, 달콤한 호박죽에 곁들이기 때문에 상큼함을 강조하고 단맛은 최소화했다.
“설탕은 거의 쓰지 않아요. 설탕 대신 꿀과 조청, 매실청으로 단맛을 냅니다. 설탕보다 당도는 덜하겠지만 정제하지 않아 보다 자연스런 단맛이 있어요. 세속의 강한 맛에 익숙한 분들도 막상 용문사에서 공양하고 나면 맛도 있고 속이 편해서 좋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정성은 공양 올리는 마음
점심에서 드디어 비빔밥을 마주했다. 콩나물과 애호박 볶음, 시금치나물, 무생채, 그리고 김가루가 전부였다.
평범한 비빔밥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전 회 차 참가자들의 호평에 공감했다. 애호박 하나도 그냥 간을 해 볶지 않고 전 날 채 썰어 소금 약간 뿌려 물기를 빼둔 것이었다. 물기 뺀 애호박은 살짝만 볶아도 색감과 식감이 살아난다. 무생채는 용문사 공양간 음식 중 유일하게 설탕을 사용한다고 한다. 비빔밥에 꼭 들어가야 하는 재료인 만큼, 단맛이 뛰어난 겨울무가 아니면 설탕을 조금 넣어야 맛이 있다는 것이다. 사찰음식은 맵고 자극적이지 않아 고춧가루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음에도, 무생채에는 꼭 고춧가루가 들어가야 한다.
콩나물은 물이 끓기 전에 넣어 열을 가해 다 익기 전 불을 꺼야하고, 숙주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야 질겨지지 않는다고 한다. 각각의 재료에 맞는 세심한 조리법이 곧 정성이고 마음이다. 곁들인 콩나물국의 고명은 송송 썬 미나리였다. 세간에서는 부추나 파를 사용하지만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 사찰음식에는 주로 미나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맛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색감만 살짝 더해도 보는 맛이 더해진단다. 용문사에서 세끼를 먹고 나니 수줍음 많은 두 공양주가 말하는 ‘정성’의 의미를 비로소 알겠다.
수선화 보살은 “정성은 공양 올리는 마음”이라고 부연했다. “마음에 변화가 있을 때 그게 맛에 영향을 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음식 간이 안 맞거나 좀 부족하게 느끼는 날은 음식을 만들 때 충분히 정성을 들였는지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잡아요. 부족하지만 항상 그 마음가짐 하나 놓지 않으려고 하지요.”
대덕심 보살은 세간에서 식당도 운영했었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 온 경험 덕에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것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사찰음식은 다르다. 조미료를 쓰지않고 재료가 한정적이라 맛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는 “정성이 곧 최상의 간”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선배인 수선화 보살님이 계셔서 사찰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비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찰음식은 스님들이 드시는 음식이잖아요. 수행을 지탱하는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용문사 공양간에서의 사찰음식 세끼,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 마음까지 든든히 채워진 느낌은 건강한 식재료에 스민 자연의 이치, 그리고 두 공양주의 정성 덕분이 아닐까.
■ 예천 용문사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길 285-30 I 010-5275-4665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