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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전체가 다 지적(知的) 산물이다. 문명의 모든 것은, 심지어 예술까지 의도를 가지고 하는 생각의 결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적이라는 말은 감각, 관습, 감정, 습관, 집단 등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숙고에 따르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삶의 높이와 효과가 모두 지적인지의 여부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숙고하는 일에서 더 큰 효과를 내게 하는 장치로 인간은 ‘논리’를 개발했다. 논리를 따라야 숙고의 효과가 보장된다. 논리를 ‘생각의 규칙’ 혹은 ‘말의 질서’라고 해도 된다. 당연히 논리는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를 결정한다. 오죽하면, 인간이 생각의 규칙을 어겼을 때, ‘염치’를 느끼도록 진화했을까. 염치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장치로 언급되는 것도 다 지적인 삶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생각의 규칙을 깨는 염치없는 행위를 ‘파륜’(破倫)이라 한다. 논리가 사람을 윤리적으로 살도록 지킨다.
파륜, 생각규칙 깨는 염치없는 행위
국민을 월북으로 몰았다 분개하고
이태원 참사에 대해 회피하면 파륜
그 반대도 파륜, 생각규칙 회복해야
‘파륜’, 즉 논리를 깨면, 개인이나 나라나 다 흔들리고 혼란스러우며 효율성이 없다. 효율성이 없으면, 다음을 향해 건너갈 힘을 내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도약하지 못하고 몸을 앞뒤로 흔들고만 있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정치 혼란이 점점 가중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이는 파륜의 요소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어서이다. 근본적이고 대표적인 몇 개만 보자.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북한을 그들의 사정에 따라 이해하자는 것이다. 소위 비판적 지식인들은 김일성에게만 내재적 접근법을 적용하여 미화하고, 박정희에게는 인권, 민주 등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여 비판한다. 논리의 기본 가치는 어디에나 적용하는 보편성을 핵심 미덕으로 한다. 논리를 파괴하여 선택적으로 적용하면서도 정의로운 지식인을 자처하였다. 파륜(破倫)의 선택적 정의로는 정치 공학적인 소비만 가능할 뿐, 사회를 정의롭게 진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파륜의 활동에 빠졌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권력 중심부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도롱뇽의 생존 환경이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고속전철 공사까지 막았던 환경운동가들은 새만금이나 수백 년 된 숲을 태양광 패널로 뒤덮어도 말 한마디가 없다. 환경운동도 정권에 따라 논리를 파괴하며 목소리를 달리한다. 결국은 환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지키는 수준이었을 뿐이다. ‘환경’의 논리성을 지키지 못하고, 권력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파륜’이다. 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북한의 독재에는 그들의 방식이라며 열광한다. ‘반독재 투쟁’이 논리적인 맥락에서 지켜지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사실은 반독재 투쟁이 아니었고, 박정희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주류세력에 대한 반대 투쟁이었을 뿐이다. ‘파륜’하느라 독재나 반독재에 대한 지적 인식이 철저하게 배양될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팬덤을 기반으로 ‘의법 독재’를 행한다. ‘검수완박’이니 공수처니 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독재적 발상인지를 알기에는 지성이 너무 굳고 얇아져 버렸다.
▲ 국가정보원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지난 4일 원훈(院訓)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이 원훈석의 글씨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인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사진 국정원]
민주화 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사람들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민주적 감수성을 키우지는 못했다. 민주적 감수성을 키우지 못하면 남는 것은 권력욕밖에 없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민주적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이유는 그들에게 ‘민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가 없으니 민주를 논리적으로 지탱하는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1980년대에 들어와 ‘민주’는 그저 간판이었을 뿐, 북한의 논리를 따라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권력 투쟁만 있었을 뿐이다. 종내에는 5·18 왜곡 특별법이 왜 반민주적인지를 알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파륜의 화룡점정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원훈석을 그 기관에서 잡은 반국가사범의 필체로 바꾼 일이다. 우리는 이런 ‘파륜’의 대통령을 가질 정도로 취약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치가 생각하는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매우 척박한 토양에 있어서 ‘파륜’적 행위라도, 그것을 정상 정치의 다른 한쪽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민주, 환경, 반독재, 통일, 평화, 다 좋다. 다만, 이제는 알자. 논리적으로 지탱될 때만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논리성으로 지탱되지 않으면, 다 헛것이라는 것을. 이태원 참사의 핵심은 국가가 세금 내는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 개념은 ‘국가의 국민 보호’이다. 피격된 우리 국민을 월북으로 몰았다는 의심에 대해서만 분개하고,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회피하려고 한다면, 이는 ‘파륜’이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만 분개하고, 피격된 우리 국민을 월북으로 몰았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회피하려고 한다면, 이도 ‘파륜’이다. 우선 생각의 규칙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깨지면, 염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의 규칙을 깨고도 염치가 느껴지지 않으면, 알아채야 한다. 자신이 사람 되는 길에서 방향을 잃었음을.
- 출처: <중앙일보>
■ 최 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