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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라고나 할까요? 체코와 폴란드 등을 통한 우크라이나에의 간접적/우회적 한국 무기 수출에 대한 푸틴의 최근 협박 발언은, “언젠가 터질” 일이었습니다. 사실 현 상황에서는 남한도 북한도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 여러 모로 사실상 개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북한은 미국의 정보 당국 말대로 러시아에 정말 포탄과 탄약을 공급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일부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에의 불법 “병합”을 “합법”이라고 주장하는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무기 수출 관계를 당장에 검증하기 힘들지만, 북한은 차후 러시아 점령하의 동부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노동력 파견 등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해 보입니다. 북한의 무기 수출보다는, 한국의 우회적 무기 수출에 대한 상당한 근거를 갖춘 탐사 보도들은 더 많습니다. 사실 한국은 세계 “죽음의 장사”, 무기 시장의 “떠오르는 별”입니다. 지금 전세계 무기 수출의 8위인데, 최근 5년간 수출 매출고가 176%나 오른 겁니다. 무기가 이제 반도체나 자동차, 휴대폰과 함께 ‘K-수출’의 핵심 품목 중의 하나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는, 아마도 러시아의 주변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갈등,전쟁에 한국 무기가 앞으로도 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핵심으로 하는 남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이상으로, 러시아와 남북한은 역사적인 근대화의 “궤도” 차원에서는 매우 깊이 서로 얽혀 있다는 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얽힘”의 측면에서 금번 사태를 한 번 다시 반추해볼까, 싶어 이 글을 씁니다.
러시아도 조선도 근세의 유라시아의 농업 기반의 관료 군주국으로서 산업화/근대화의 길에 “후발 주자”로 들어선 것입니다. 단, 러시아는 조선보다 다소 일찍 그 길에 들어서는 관계로 한 때에 조선에게 “근대화의 본보기”와 같은 역할을 한 바 있었습니다. 절대 왕권을 골자로 한 1899년의 <大韓國國制>에 대해서는 일부 사학자들이 그 모델로 제정 러시아의 절대 왕권을 지목하는데, 아마도 타당한 추론이라고 봅니다. 고종에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제 정치”가 한 때에 왕실 중심 국가의 모델로 보였다면, 북한 초기의 권력자들에게는 소련의 당-국가 역시 혁명적 근대 국가의 모델로 보였습니다. 정치국, 즉 집단단 지도 중심의 후기 소력과 달리 북한은 1972년 “유일사상체제” 성립 이후 수령주의 국가로 발전돼 왔지만, 당 관료, 그 중에서도 인사권을 장악한 조직지도부 관료 중심의 정치체제 운영이라는 차원에서는 북한의 시스템은 여전히 구소련과 상당히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데 남한이라고 해서 근대화 초기에는 소련의 경험을 전혀 무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한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직접적인 전례는 만주국의 경제계획 제도이었겠지만, 멀리는 스탈린 시대 산업화의 경험을 그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니 러시아와 한반도 국가들이 “같은 후발 주자”라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는 한 때에 러시아/소련은 약간 “앞선” 부분이 있어 한반도 국가에 “참고”가 된 부분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몰락 이후에는 그 관계가 뒤집혀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남한에 협박장을 꺼내든 푸틴은 1990년대 초반에 상트-페테르부르그 부시장으로서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것인데, 그 때에 한국 호스트들에게 러시아 사절단이 받은 “무시”에 상당히 놀라고 자존심이 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데 이 “무시”는 한-러 사이의 새로운 역학 관계에 기반한 객관적인 현실의 반영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은 그 때에 러시아에 경협 차관을 제공한 채권국이 된 것이고, 러시아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산 자동차나 휴대폰 등 기술 집약적인 상품을 사들이는 대신에 한국에 주로 자원을 제공해주는 한국의 선진 산업 자본주의의 “주변부”로 전락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사실 한때에 한반도 국가에 비해 선발 주자이었던 러시아가 이제는 한참의 후발 주자로 변신한 것은, 푸틴 정권의 “박정희 모델 벤치마킹”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전기 (한전)나 제철 (포철) 등 일부 전략 부문들을 국유화하고 주요 은행들을 사실상 국유화한 한편, 정주영이나 김우중, 이병철 등 재벌가들을 중점적으로 관리, 지배하면서 관 주도의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았습니까? 푸틴 체제는 국가-재벌 관계 설정의 차원에서는 거의 박정희 체제를 그대로 닮은 꼴입니다. 자원 재벌에서는 국가가 지배적 지분을 갖고 있으며, 은행 부문에서는 국영은행의 시장 점유율은 무려 72% 정도죠. 일면으로는 이외의 재벌가들에 대해서는 푸틴은 개별적으로 “관리”하면서 사설 군사 업체인 “와그너 그룹”을 운영하는 프리고진처럼 그들을 “정책 대리인”으로서 이용하기도 하죠.
한데 상대적인 고립 속에서의 군수산업 본위의 개발의 경험을, 러시아가 지금 북한에서도 배우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이제는 러시아가 한반도 국가의 모델이 된다기보다는 한반도 국가들의 경험이 러시아에 큰 참고가 되는 거죠. 푸틴의 매우 불편한 심기는, 이런 역사적 “뒤집혀지기”에 대한 그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협박장이 날라온 뒤의 한-러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요? 북한과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계속 가까워지는 현재 추세로 봐서는, 두 나라 사이의 모종의 군사 협력은 - 비공식적으로라도 - 아마도 불가피할 듯합니다. 단, 이 협력의 “수위”가 차후 한국의 대우크라이나 무기 수출의 추이에 달려 있다는 것은 아마도 협박의 골자일 겁니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역으로 인력을 확대하고, 현대자동차가 생산 중단해도 쉽게 “철수”를 결정하지 못하는, 한국 대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중국 경쟁사들에 쉽게 내주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으로 봐서는, 아마도 윤 정권은 앞으로 은근살짝 대우크라이나 무기 수출의 규모를 줄여 대러 관계를 “관리”할 가능성이 좀 더 큰 것 같습니다.
한국 외교의 큰 그림은 당연히 미국의 “지도”를 따르는 것이지만,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이해관계는 그 다음으로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병영국가 체제를 구축해 앞으로는 대서방 갈등 속에서 군수 산업 위주의 추격형 공업화를 계속 해나갈 러시아지만, 아마도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과도 지속적으로 교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교류는 꼭 한국 대기업의 투자나 상품 판매에만 한정될 일도 없을 겁니다. 푸틴의 장기 1인 독재와 전국 요새화 등에 피로감을 느끼고 서방으로부터 고립되고 자율권이 없는 러시아 대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러시아 학생들에게는, 한국 대학들은 상대적인 “연구 자유의 오아시스”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즉, 차후 연구의 자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민주 사회를 경험하고자 하는 러시아 유학생들의 한국 대학에의 유입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서방과의 교류가 막힌 러시아 대학들로서는, 아마도 앞으로는 한국과의 교류는 또 하나의 “출구”로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서방과 러시아의 대치 상황은, 역으로 한-러 관계에 어떤 “활력”으로 작용돼 일부 부문에서는 한국은 러시아인들에게 “대안적 서방”, 그나마 접근이 가능한 선진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북한과 가까워지는 러시아는 앞으로 남북이 “조우”할 수 있는 일종의 “제3 지대”가 될 수 있을는지, 즉 동시에 발전되는 한-러 및 북-러 관계가 남북의 대화에 어떤 도움이 될는지 좀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좌우간 이번 협박 사태로 한-러 관계가 결코 끊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건 제 예상입니다. 러시아와 한반도의 운명적 “얽힘”은 앞으로도 지속될 듯합니다.
- 출처 : 박노자 교수 블로그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