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한시간이 넘는 시간을 비행기안에서 보내고 우리는 어느새 지구의 반대편으로 도착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안에서 내려다본 뉴질랜드라는 땅은 정말 아름다웠다.
온갖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서있는 우리 나라의 수많은 빌딩들 대신 푸른 초원에 하얗게, 마치 밥풀데기(밥알들)처럼 널려있는 양떼들로 가득 했다.
공항에 마중을 나와준 남편(사이먼)의 친구를 만났다. 일단 우리는 그 친구를 따라 본인이 묵고 있는 YMCA 로 갔다.
숙박 수속을 해놓고 그 친구랑 공공기관에 가서 간단한 수속을 밟았다. 사실 그 당시 사이먼의 친구는 학생이었고 한참 시험 기간 중이었는데도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해먹고 살아야 하나 “ 고민중인 사이먼과는 달리, 아이비는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잔디가 있는 곳엔 항상 붙어있는 팻말 “잔디에 들어가지마시오!” 때문에 밟아 보지못했던 잔디위를 마음껏 활개 치고 다녔었다.
그 날 저녁부터 우리의 취미는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며 한국과의 가격차이를 비교하며 이 나라의 물가시세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워낙에 할 것들이 없는 나라이기에 어떤 날은 새벽2시에도 나갔었다. 새로운 물건들의 가격들을 비교하고 한국돈으로 환산해보는 자체가 재미였고 또한 빨리 현실 감각을 익히는데 도움이 돼주었던 것이다.
<웬 방광염?>
우리는 시내와 가까운 YMCA 에 거주를 하면서 매일매일 시내를 활보하였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우리 나라와는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철부지 시절이라 걱정보다는 다른 것들에 대한 동경으로 모든 사물들을 긍정적으로 아이비는 바라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체국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 아무리 앞사람이 오래 걸려도 얼굴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린다든지, 정말 우리 나라 같으면 당장 "아 빨리 빨리좀 합시다!" 라고 뒷사람이 한마디 할만도 한데 말이다. 장애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참으로 배울만한 점이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심한 방광염에 걸리고 말았다. 그당시 YMCA의 화장실은 변기의 물을 내리면 앞으로 물이 넘칠 만큼 물살이 세었다.
한국 여자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여자분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며 이용과 동시에 변기의 물을 내리면서 자연적인 현상으로 나는 소리를 가리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나는 당연히 한국 화장실로 생각을 하고 이용과 동시에 물을 내렸는데, 변기의 잘못인지 아니면 이나라 물살이 센지, 당하고 만것이었다. 아뿔사!
얼굴이 노래지고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아이비는 일단 병원은 가야겠고 어디가 병원인지 버스는 몇번을 타야되는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었었다.
사이먼은 시내에 있는 아무 가게에 무턱대고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한국 분이 하는 선물 가게였다. 그 할아버지가 전화로 택시를 불러주었다. 헌데 병원은 바로 코너를 틀면 바로 거기였다.
얼굴이 노랗게 질린 나를 보고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젊은 총각 같은 의사는 괜찮을 것이라며 처방전을 주고 우리는 그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서 먹었다.
처방전을 받아야 약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사이먼과 아이비였다. 당시만해도 한국에는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약을 살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그 약을 이틀 먹으니 싹 나아버렸다.
그 인연을 계기로 우리는 시내에 갈때마다 그 할아버지 가게에 들러 고마웠다고 인사도 드리고 많은 조언도 들을수 있었다.
우리가 숙소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그 할아버지가 한 집을 소개 해주었다. 밤 9시에 알려준 주소를 가지고 갔더니 영국 할아버지가 살고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대충 구조만 둘러 보고 나왔다.
한국의 원룸 방식이었다. 그런데 집을 구할 때는 밤에 집을 구경하지 말라는 사실을 무시한 사이먼과 아이비는 그 값을 톡톡히 치루게 된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 하기로 한다.
아무튼 집을 옮기기로 하고 YMCA에서 Check out까지했는데 우리가 이사하기로 한 그 집 소개자가 착오가 생겼다며 2주 뒤에나 집을 비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상치도 않은 기간을 기다려야 했고 사이먼과 아이비는 당장 지내야 할곳이 막연한 상황이 되어 버린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는 와중에 자동차를 구입했다. 뉴질랜드에 살려면 차는 필수였다. 장을 보러갈때도 Food Town 등등의 슈퍼마켓이 멀기 때문에 걸어서는 다닐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버스값이 한국과 비교해서 비싸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차를 사기로 결심을 하고 알아보러 다니던중 어느 한국 분의 차를 사기로했다.
당시 영어가 잘 안되고 돈도 무조건 아껴야 된다는 생각에 3000불에 광고난 Station Wagon을 몇백 불을 깍아서 사게 되었다. 일단 짐을 실어 나르기도 편하고 가격도 적당했으니...
그때 우리에게 차를 파신 가족분들이랑은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사이먼과 아이비의 NZ 이민기를 계속 읽어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어렵고 외로운 이민 초기에 만난 분들과의 인연은 세월이 지나가도 소중하게 남는다. 그런 분들과 서로의 삶들이 어려울 때 연락도 해가며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가는게 이민자의 행복이라 할까? 아마 이민 오신지 오래되신 분들은 아이비의 이 말에 동감을 하시리라 믿는다.
사이먼과 아이비는 과감하게 이때가 기회다 싶어 새로산 차를 몰고 1주일을 로토루아로 여행을 가기로했다. 일단 생활이 시작되면 여행을 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사이먼은 한국과는 상당히 다른 이 나라의 운전규칙을 속독으로 친구에게 배우고 덜컹거리는 왜곤을 타고 아이비랑 Rotorua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