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 여름, 남편의 친구인 S씨랑 동생 Y 그리고 남편과 나, 이렇게 넷이서 북섬 여정에 나섰다.
여정의 목적은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며 지낼 수 있는 (한국인이 많이 없어 영어를 쓸 수 밖에 없는 환경) 학교와 지역을 물색하자는 데 있었다.
오클랜드에서 출발하여 Hamilton, Rotorua, Gisborne, Napier를 지나고 Porirua라는 곳에 도착을 했을때 우리는 Whitireia라는 폴리텍을 방문했다.
사모아인들과 이 나라 원주민인 마오리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었다.
학교를 둘러보고 Co-ordinator를 만나 영어 코스를 알아보고 우리는 그 지역을 둘러보았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오클랜드에서의 불친절한 키위들만 보다가 친절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컸던 것 같다.
다시 Wellington에 도착해 웰링턴 폴리텍을 방문했다. 이 나라의 수도인 웰링턴은 바람이 많이 불고 기후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나 오클랜드에 살고있는 교민들은 싫어하는 지역이었다. 막상 도착을 하니 왠지 느낌이 항구 도시라 그런지 마치 한국의 우리고향 부산과 아주 흡사함을 느꼈다.
탁 트인 바다와 스쳐오는 짭짤한 소금 냄새에 우리 모두는 잠시 고향을 그리며 향수에 젖었었다. 시내로 들어서서 많은 차량과 좁은 주차공간 그리고 많은 직장인들을 보니 역시 수도답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짧은 일정에 될 수 있으면 많은 곳을 보려고 애를 쓰다보니 한 곳에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남편과 친구가 교대로 운전을 해가며 뜨거운 여름 날씨에 아주 고생을 많이 했었다.
웰링턴에서의 시간들은 아주 느낌이 달랐다.
마치 고향을 찾은 듯한..아쉽지만 빨리 떠나야 했다. 시간을 아껴야 했다.
Porirua, Paraparaumu를 지나고 Levin 그리고 Palmerston North에도착해서 Massey 대학을 둘러보았다. 그때만 해도 남편과 나는 우리의 미래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Wanganui를 지나 New Plymouth로 가던 도중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비포장도로를 지날 때였다.
앞에서 공사 중이던 차가 건너편에서 중앙선을 넘겠다고 신호을 주고 있었고 남편은 우리가 갈터이니 넘어오지 마라는 의미로 차 쌍깜박이를 켰는데 (한국에서 해오던 것처럼) 앞의 공사차는 그 신호를 보고 바로 중앙선을 넘어 오는것이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뉴질랜드에선 그 신호는 바로 내가 양보하마..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급브래이크를 밟고 우리차는 몇바뀌를 돌았는지 나는 그 순간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끝이 나는구나 하고 옆에 앉은 Y의 손을 꽉잡고 그 순간을 견뎠다.
마침내 우리차가 정지했다. 화가난 S씨는 앞의 공사차에 가서 화를 냈고 정신이 없던, 나머지 우리들은 차 안에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잠시 쉬어가기로하고 근처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셨고 서로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고 다시 차에타고 출발하려던 순간 또 하나의 사고… 남편은 내가 뒤좌석에서 채 타지도 않았는데 차를 달려버린것이다.
다행이 약간의 상처와 청바지가 찢어졌지만...
그날은 정말 악몽이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