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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1/2006. 11:01 KoreaTimes ()
뉴질랜드 이민기
웰링턴으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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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런 저런일을 겪었던 Porirua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남편과 나는 차로 길어야 2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 웰링턴으로 이사를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둑맞은 기억만 빼고는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Porirua생활이었다, 물질적인 여유로움이 아닌 정신적인 여유로움을 한 껏 가졌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나눴고 남편과 함께 산책을 하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설계도 무수히 했었던..., 지금도 남편과 나는 가끔 그때의 시간들을 되돌려 보곤한다.
학교앞 flat을 rent해서 남편 친구, S 씨랑 셋이서 1년동안 지내게 되었다.
S씨는 그때 당시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우리는 부부이기에 지내기에 좀 불편할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우려를 무안하게 만들만큼 우리는 잘 지냈다.
(S씨가 많이 이해해 줬겠지만^^)
Chang 아저씨와의 인연으로 우리 셋은 Massey 대학 웰링턴 캠퍼스에서 Business computing을 공부했다. 그 작고 초라한 공간은 점점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갔고 Chang아저씨, Thomas아저씨, Danny 아저씨 그리고 그 당시 이민을 온 J씨 등 많은 친구들과의 추억들이 묻어갔다.
얼마전 웰링턴을 방문했을때 Thomas 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라면을 먹어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하시던..."
그때가 아마 이맘때 였을것이다.
이민생활의 기반이 되어준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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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서로 같은반이 되지 않기위해 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잘해서 남편은 A반이, 나는C반이 되었다. 내가 Nicola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 날.
커다란 덩치에 찢어진 스타킹에 검정 가죽부츠를 신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그 아이, 팔뚝에 커다란 문신까지, 아무도 옆에 앉으려 하지않고 혼자 앉아있는 그녀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왠지 슬퍼 보이는 그 모습이
마치 내가 한국에 두고 온 언니들이랑 엄마를 그리워하던 나의모습을 보는 듯해서 였을까?
알고보니 겉모습과는 너무 다른 따뜻한 사람이었고.
우리는 첫 대면에서 뭔가 통한 것처럼 잘 맞았다.
그로부터 니콜라와 나는 한 반의 단짝이 되었고
우리 남편이 질투할 만큼 붙어 다녔다.
아니 나중엔 함께 셋이서 공부도하고 니콜라 아빠가 하는 농장으로 놀러도가고 넘 재밌게 보냈다. 그러다 한 학기 두학기가 가다보니 니콜라랑 남편은 과 수석을 다투는 실력까지같다.
둘 다 넘 열심히 공부했고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나까지 덩달아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그 추웠던 겨울, 감기 걸려 죽을 것같은 몸으로도 털모자 퍽! 눌러쓰고 얼어붙은 차를
깨워 새벽에 학교로 향했던 시간들, 시험이 있을때는 새벽일찍 나가 빈 강의실에서 남편이랑 마지막 정리하느라 머리털이 바짝 바짝 솟았던 그 시간들이 우리의 대학생활이었고 뉴질랜드 이민생활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C++을 공부할 때 넘 힘들어 포기해야겠다는 나에게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졸업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남편에게 너무 감사한다. 덕분에 과에서 몇 안되는 여자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후 일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S씨 장가가고 사이먼 기빠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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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12월, 우리와 함께 지낸지 1년쯤 지났을쯤 님편의 친구 S씨에게 아주 기쁜 일들이 생겼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사이라는 SH씨와 결혼을하게 된것이다.
"그래 뭐니 뭐니해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진국이지...암"
우리는 알게 모르게 S씨를 부추겼다.
결혼식을 올리고 두 달쯤 뒤 뉴질랜드로 왔다.
당시 우리는 시내에 있는 Dixon street의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살고 있었다.
신혼부부가 도착하기전 사이먼은 Housing에 근무하는 캐리라는 여직원에게 한국 사탕을 공세해가며 사탕발림(?)으로 우리 아파트 바로 옆옆집으로 구하게 되었다.
신혼부부는 너무 재미있게 알콩달콩 잘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 또한 마음이 흐뭇했고...
그 다음해, 2000년 3월 사이먼에게도 기쁜일이 생겼다.
수상으로부터 Goal Setter Award (장학금)을 시상받게 되었다.
사실 몸이 아파 지원 마지막 날, 그것도 겨우 지원서를 작성해서 쿠리어로 보냈는데...
인터뷰 보는 9명중 후보에 올랐다고 편지가 왔을때만해도 과연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주위에서 용기를 주시던 몇 분과 빅토리아대학 영어교수 사라의 도움으로 어느정도 자신감을 안고 인터뷰를 보러갔다.
헌데 저녁 6시에 인터뷰가 있었는데 사이먼이 도착하니 이미 빌딩문이 잠겨 버렸다.
그때 휴~하고 돌아서 왔다면 사이먼의 운명은 또 바뀌었을 것이다.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을 설득해 잠긴 문을 따고 인터뷰를 보는 장소까지 안내를 받았단다.
다행히 그동안 기록해 나갔던 여러권의 일기식으로 쓴 이민일지 노트를 보여 주어가며 여유있게 인터뷰를 잘보고 왔었다.
시상을 받게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남편이랑 너무 기뻐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지내오면서 힘들었던 모든 고통들이 사르르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우리의 선택으로하는 사서고생이라 할 지라도 왜 우리도 힘들지 않았겠는가....
서로에게 흥을 부추기면서 괴로움을 줄여 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