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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008. 10:37 뉴질랜드 코리아타임스 (124.♡.145.221)
지구촌 평화 특명대사 유엔UN
1) 200년 영국 통치의 인디아 대륙 (1757–1947)
캬쉬미르 분쟁을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이 지역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인도 회사 (East India Company)",
당시 영국 정부의 황실 영향력을 인디아 대륙까지 확장하려는 의도에 따라 영국 개인 투자회사가 1614년 봄베이에 설립되며 아마 이때가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요즈음 흔한 해외투자 회사가 설립된 셈이다. 이후 동인도 회사는 인도 정치 상황에 깊숙하게 개입하게 되므로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는 완벽한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영국은 점진적으로 그들의 통치 영역을 넓혀 갔으며 1823까지 인도 대륙의 3분의 2를 지배하게 된다. 이때 영국인들은 "The sun never sets on the British Empire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되고 다녔다. 이때부터 영국 식민지 통치하의 모슬렘들은 영국인들과 힌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는 최악의 암흑시대가 되었다.
이 대륙의 독립 운동은 모슬렘과 힌두의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배경으로 일어났고 영국 정부는 힌두를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된 인도로 유지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47년 결국 같은 종교 즉, 이슬람을 믿는 파키스탄과 다수 힌두주인 인도로 각각 다른 독립된 나라로 분할시켜 버렸으며 인도의 동쪽 이슬람을 믿는 동파키스탄이 1974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되어 오늘날의 방글라데시로 세계지도 속에 그려지게 되었다.
인도 대륙이 분할될 시기에, 총 502개의 작은 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캬쉬미르는 1947년 분할 계획에 따라 인도. 파키스탄 어느 쪽에 붙을 것 인가를 각 인구의 다수 의지와 희망에 의하여 주통치자의 선택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곳의 인구는 78 퍼센트가 모슬렘이고 통치자는 힌두인 이었지만 어느 한쪽에도 포함되길 원하지 않았으나 인도 입장에선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캬쉬미르 지역을 갖고자 했다.
하지만 결정 시기가 계속 미뤄지자 Poonch (푼치)지역 캬쉬미르인들이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길 희망하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힌두 통치자 "마하라자 (Maharaja)"는 시위대 진압을 위하여 그의 특수부대로 하여금 사격을 명령했다.
이로 인하여 수백명의 모슬렘 사상자가 났으며 이를 저항하기 위하여 일제 시대에 우리의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아자드 (Azad) 캬쉬미르 정부가 수립되어 힌두 통치자에 대한 지금의 테러와 비슷한 피의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
계속된 쌍방간의 치열한 보복과 보복전으로 많은 인명이 죽어가자 1948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즉각적으로 정전과 쌍방 군대의 철수, 유엔 감시하에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했다. 1949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이행되었고, 1949년에 파키스탄이 점령하는 캬쉬미르 즉, 잠무, 푼치, 라왈라코트, 돔멜, 북쪽의 길깃, 스카루드, 중국 국경에 접한 라닥 (Ladakh) 지역과 인도가 점령하는 캬쉬미르 계곡, 잠무, 티벳을 국경으로 하는 라닥 일부지역에 정전선이 그려지게 되어 한반도의 38도선과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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