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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햇살이 통도사 다원(茶園)의 차나무 숲 위로 아낌없이 쏟아진다.
마치 거대한 초록빛 구름이 땅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넘실대는 부드러운 곡선의 숲 사이로 사람이 보인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 이고, 나누며 서로 다름을 상생의 지혜로 연대해 온 두 사람,
이제는 제2의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유동섭 · 이동임 부부가 그들만의 산사 여행을 시작한다.
이곳, 여름의 통도사에서.
불교를 사랑하는 역사 선생님
“도비는 자유예요!”
영화 해리포터 속의 집요정 도비가 자신을 속박하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순간 외쳤던 한 마디. 그 대사를 장난스레 외치는 유동섭 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아내 이동임 씨와 함께하는 첫 템플스테이, 이날은 수십 년간 교직에 몸을 담았던 그의 퇴임이 48일 남은 날이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외치며 직장을 떠난다고 하던데, 아마 그날이 되면 나도 이렇게 말하며 떠나지 않을까?” 청년 시절부터 어느새 초등학생 손자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헌신한 삶의 터전, 자신이 사랑한 한국의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전통문화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그이지만 얼굴에는 섭섭함보다 알 수 없는 설레임이 더욱 묻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동섭 씨는 소문난 템플스테이 애호가! 이미 오래전부터 전국의 크고 작은 산사를 찾아 불교와 선 수행에 심취했던 그이기에 앞으로 다가올 퇴임은 끝이 아닌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의미하는터다.
이미 100여 번에 가까운 템플스테이 경험으로 지난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찾은 우수참가자에 선정된 유동섭 씨에게 이번 여행은 더욱 특별하다. 늘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아내 이동임 씨와 함께 하는 첫 번째 산사 여행이기 때문. 그간 종교가 다른 아내에게 선뜻 산사 여행을 제안하지 못해 늘 홀로 마주했던 산사의 아름다움을 이번에는 반드시 전해주고 싶었다고.
“지난번에 혼자 갔던 템플스테이에서 음악회도 하고, 좋은 차도 나누어 주셨는데 참 좋았어요. 아내가 음악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 마시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무작정 가자고 했지(웃음).”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하길래 따라 왔는데 이렇게 큰 사찰에서 머물게 될 줄은 몰랐어요. 깜짝 놀랐지만 고마운 기회로 생각합니다. 덕분에 좋은 여행을 할 것 같아요.”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기’라는 약속과 함께 부부의 가약을 맺었다는 유동섭 · 이동임 부부. 두 사람의 지난 시절은 이렇듯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며 살아온 지혜가 보석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보물과도 같은 사찰, 통도사의 하룻밤도 그렇게 기억되리라.
통도사, 이토록 가득한 아름다움
통도사의 새로운 템플스테이 전용공간인 ‘국제 템플스테이관’은 연중 방문객이 많은 사찰 경내와 다소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다. 낮에는 영축산 아래 너른 다원(茶園)의 전경을, 밤에는 파노라마처럼 별과 달이 새겨진 하늘을 만날 수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 이곳을 책임지는 통도사 연수과장 금모 스님이 먼길을 찾아온 부부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더운 날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통도사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큰 사찰입니다. 그만큼 보물도 많지요. 어떤 곳부터 소개해야 통도사에서 더 좋은 추억을 담고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웃음).”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신 ‘불보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법보종찰’ 합천 해인사, 한국불교 승단의 근간인 ‘승보종찰’ 순천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을 이룬다.
보여줄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이 되었다는 스님의 말씀처럼 통도사의 풍부한 문화유산은 사찰 초입의 삼성반월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길게 이어진 경내 곁을 따라 흐르는 계곡, 그 위로 속세와 반야의 세상을 잇는 아치형 석조 다리에는 흔한 난간이 없다. 오롯이 집중한 걸음만이 세상 그 어떤 위태로움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듯이.
거대한 가람의 중심에는 이곳을 불보사찰로 명명하게 된 이유인 적멸보궁(寂滅寶宮),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국보)이 자리한다.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전각들은 화려한 색을 벗어 오히려 위엄을 더하는데, 불상을 모시는 대신 금강계단의 사리탑을 마주 보게 되어있는 대웅전에서 그 고적한 아름다움은 절정에 다다른다. 옛사람들이 치열하게 새겨놓은 석 · 목조 조각들이 천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꽃으로, 구름으로, 천상의 새로 남아 찾아오는 이들에게 형형한 울림을 전하는 것이다. 문득 그 무게감에 압도되려는 찰나, 스님은 부부를 연꽃이 탐스러운 자그마한 연못으로 부른다.
“이 연못은 구룡지라고 합니다. 오래전 통도사에는 성질이 거친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창건주인 자장 율사께서 이들을 제도하고 미처 떠나지 못한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지요.”
잠시 쉼표 같은 옛 설화를 전해준 스님은 용화전 마당의 ‘석조봉발’, 일주문 현판에 남겨진 흥선대원군의 글씨까지 촘촘한 설명을 이어가며 부부를 이끌었다. 마침내 경내 밖을 나와 마주한 것은 통도사 8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