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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3년 넘게 함께 살고 있는 메시 대학 학생이 있다. 싱가폴에서 유학을 온 학생인데, 수의학 공부를 한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그는 매너도 좋다. 방학 때마다 싱가폴을 다녀왔던 그는 코비드 때문에 2년 내내 뉴질랜드에 묶여 있었다.
바쁘고 활기 넘치며 맛있는 길거리 음식에 마음껏 쇼핑할 수 있는 싱가폴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에게 이곳 생활은 유배지와도 같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2년을 잘 버티고 한 학기 휴학의 시간을 갖는다.
미뤄두었던 형의 결혼식도 있고, 한국의 예비군 훈련처럼 미뤄두었던 국방의 의무도 완수할 겸 가족들과 함께 유럽여행도 다녀올 겸 겸사겸사 이번 한 학기가 충전의 시간이 되고 있다.
뉴질랜드의 국경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던 형의 결혼식에 참여하느라 싱가폴에 갔었던 그는 한 학기를 아예 쉬기로 결정한 거 같다. 쉬는 김에 유럽여행도 다녀올 것이라고 했다.
그의 엄마는 아들 결혼식을 치루고 난 뒤의 자신에 대한 포상인지, 한 달 동안의 남섬 여행을 선택했다. 두 모자는 한 달 동안 남섬 여행을 하고, 우리 집에 돌아와 사흘 동안 지내다가 싱가폴로 돌아갔다.
나이보다 10살 이상 더 젊어 보이는 그녀는 2년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봤던 그때나 지금이나 무척 아름답다. 요가 선생이었으며 스포츠를 즐기는 그녀의 균형 잡힌 몸매는 탄탄하며 눈이 부셨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돈 버는 게 직업이고, 자신은 그 돈을 쓰는 게 직업이라고 말한 그녀. 남섬 여행 내내 나를 위한 쇼핑 시간도 아끼지 않았다.
크리스탈 그릇에 담겨 있는 비싼 향초, 고급 올가닉 허브티, 약용으로 쓰이는 허브 오일, 얼굴 마사지 팩..등 바리바바리 싸서 쇼핑 백 하나 가득 선물하였다. 그녀는 정말 돈 쓰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여행도 세계 곳곳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다.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나에게 싱가폴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내년에 자신이 뉴질랜드에 왔다 갈 건데, 그때 함께 가잔다. 2주 정도 자신이 내 보디가드가 되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게 웬 횡재?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본 그녀는 내 종교를 물어봤다. 그 십자가는 천주교 신자인 내 동생이 주고 간 것이다. 난 특별한 종교가 없지만, 예수님을 좋아한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한다.
그녀는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요즘 내가 새로 시작한 온라인 불교대학에 대해서 말했다.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불교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입학했는데, 잘 한 거 같다고. 마음공부하기에 좋은 기회인 거 같다고.
종교에 대한 벽이 없는 그녀와의 대화는 평화 그 자체였다. 내가 외국여행을 할 수 있는 기력만 있으면 만사는 OK이다. 난 그녀에게 여행하기 전에 체력단련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맞는 간단한 기본 요가 동작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꽃 농장에 가겠느냐고 했다. 그 꽃 농장은 별 5개를 받은 매우 아름다운 농장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따라가겠다고 했다.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나는 그녀와 함께 카페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에스프레네드 공원을 걸었다. 꽃 농장에 가기 전에 파미의 자랑이며 시민의 놀이터를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공원의 벚나무는 눈부신 핑크빛이었다.
줄을 지어 서 있는 화려한 벚나무가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녀는 사진기를 들고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포즈를 취하라고 했다. 어색했지만, 그녀의 요구대로 포즈를 취했다. 뻣뻣하게 서 있는 나에게 다양한 포즈를 가르쳐 주면서 그 포즈대로 하고 있으란다.
숲길 속에서도 벚나무 아래에서도 그녀가 보기에 좋은 곳이면 카메라를 들이민다. 나도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녀의 포즈는 장난이 아니었다. 어쩜 그리도 다양하게 예쁜 모습을 연출하는지.
공원에서의 사진 찍기 놀이를 마치고, 지인을 만나 꽃 농장으로 갔다. 그 농장은 주말에 손님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가 간 날이 토요일이었으니,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가 없는 게 당연했다만, 우리 차는 팻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다 지인 덕이었다.
주인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린하우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인은 내가 좋아하는 수국 묘목들을 골라주었다. 수국나무들을 내 차에 옮겨 싣고 나서 농장 주위를 돌았다. 한 달 후에 오면 그야말로 환상의 정원으로 바뀐단다. 지금도 아름답기 그지없다만.
난 그곳을 나와서 각자의 차를 둔 곳까지 왔을 때에서야 지인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지인은 그날 우리 집 정원에 수국나무들을 심어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있는 단풍나무와 오크 나무도 가져와서 함께 심어주려고 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 차를 타고 우리 집에서 만났는데, 이미 그는 집에 들러서 흙과 묘목들을 가져와 일을 벌려 놓은 터였다. 그때의 내 감동스러운 마음은 뭐라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훌쩍 넘어 점심때를 알려주고 있었다.
세 사람이 나무들을 심는 동안 나와 그녀는 급하게 점심 준비를 했다. 이럴 땐, 라면이 최고였다. 마침 라면이 넉넉하게 있었다. 물을 끓이고 채소를 꺼내어 썰고, 테이블 세팅을 하고 김치를 꺼내 놓았다.
라면은 맛있게 끓여졌으며, 우리 다섯 명은 라면을 먹으며 행복했다. 참 간단한 점심이었지만, 차도 마시고 과일도 챙겨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 하던 도중에 점심을 먹은 거라서 다시 마무리를 하고 그들은 떠났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일을 끝내자마자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완벽할 수가! 세 국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짧은 시간 동안 해 낸 일인데.
손님은 손님방으로 나는 내 방으로 각자 쉼의 시간을 가졌는데, 스시숍에 스시가 남았다는 연락이 와서 얼른 달려갔다. 오늘 애 써 준 지인에게 저녁을 짓기 전에 가져다주고 싶어서였다. 우리 집 저녁은 이미 사위의 특별 요리 준비로 분주했다.
지인에게 스시를 가져다주고 나서 집에 오니, 손님도 손님방에서 나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손님은 사진 작업을 해두었다. 사진들을 엮어서 음악 비디오를 만들어 놨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반나절 동안 함께 지내면서 스마트 폰 안에 많은 것을 담아두었다. 사위의 멋진 요리와 더불어 특별한 하루를 마쳤다.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일들이 줄지어 연결이 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하게 끝난 하루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녀의 행복한 에너지 덕분인 거 같았다. 그녀에게 이런 내 생각을 말하니까,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의 에너지가 시너지 효과를 얻어서라고 했다. 말도 어쩜 그리 예쁘게 하는지.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날 준비를 완료한 그녀는 나에게 맞는 간단한 요가 동작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의자를 이용한 요가인데, 무리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몸동작에 비해 내 동작은 뻣뻣한 나무토막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운동이라고는 걷는 거 말고 하는 것이 없으니.......
두 모자의 배웅은 내가 맡기로 했다. 내가 가장 시간이 많은데다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공항에서 배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그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를 위해 카톡에 가입한 그녀. 카톡을 통해 나에게 온 메시지는 한글. 자상하기 그지없는 평화주의자인 그녀의 아름다운 배려였다.
크라이스트쳐치에 도착해서도 한글 카톡은 이어졌고, 그 다음 날 아침 선물로 요가 비디오를 보냈다. 평온한 음악과 함께 내게 가르쳐 준 동작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낸 것이다. 뉴질랜드에서의 그녀의 5주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두뇌회전이 점점 더 늦어지고, 몸 또한 느려지고, 인지능력 또한 저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몰랐던 할머니가 86세까지 사시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셨을까? 지금 내가 딱 그 꼴짝일 수도 있겠다. 변해가는 현실에 따라가지 못해 쩔쩔매니.......
그래도 세상이 좋아 할머니보다는 편안하게 지내니,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건강 잘 챙기면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