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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현숙
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겨울이면 여유로운 그이 덕에 나는 가끔 이런 호사를 한다.
빈 그릇만 남은 밥상에 기분이 좋았던가. 상을 물리던 그이가 새해에도 된장 맛이 좋을 거라며 윗목에 자리 잡은 메주를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르던 내 눈이 어느 순간 놀라움으로 멈췄다.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있는 메주를 달고 선 긴 나무틀, 그것을 기울지 않게 받치고 있는 것은 거듭 보아도 글 친구 넷이서 쓴 우리 수필집이었다. 놀란 마음을 숨기며 시선을 돌려봐도 속에서는 쿵쿵 천둥소리가 났다.
그이와는 농장이웃으로 만났다. 농사초보인 우리는 알짜농부인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농장도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고 서로를 추어가며 십여 년을 가까이 지냈다. 농사 외에는 딴전 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준 것은 그들 부부 얘기가 거기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갈 때마다 책에 눈이 갔고 볼 때마다 좋았다. 두툼한 족보 몇 권이 전부인 키 낮은 책꽂이에서 우리 책은 겨울옷만 입던 사람이 새로 산 봄옷을 걸친 듯 화사해보였다. 그렇게 폼 나는 자태로 기쁨을 주던 책이 엉뚱한 곳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슬며시 책꽂이를 훔쳐보았다.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잠깐 서운했지만 화나지는 않았다. 원망의 마음도 없었다. 책을 의식했다면 밥 먹자 부르지도 않았을 무구한 사람 아닌가. 어쩌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책 주인에게 미안할 까닭도 없이 메주 틀의 균형을 잡아줄 맞춤한 책이 그저 반가웠을 것이다. 아침저녁 군불 지필 때 불쏘시개로 재가 되었다 해도 몰랐을 일이다. 뜨거운 냄비를 받치다가 태워버렸다 한들 알았겠는가. 몇 해가 지난 책을 보관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놀란 속을 가라앉혔다.
오래전 어느 강좌에서였다. 강사인 시인이 자신의 책이 냄비받침으로라도 쓰였으면 좋겠다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그 말은 공감하는 쪽과 분개하는 부류로 나뉘었는데 나는 분노하는 의견에 화를 보탰다. 그런데 배달되어 오는 책을 포장지도 뜯지 않고 쟁여놓는다는 작가들의 고충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인들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무엇으로든 쓰인다는 것은 관심 밖에서 정물로 놓여 있던 책이 새로 생명을 찾는 일이 아닐까. 잊히는 것보다는 요긴하게 사용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책이 그러기를 바란 적도 없다. 그러니 책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은 것에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거기에 새로 맡은 일의 무게가 어디 냄비받침에 비할 것인가. 한 끼 찌개 냄비를 받치는 일이 한 해 식탁을 책임지는 메주의 위상을 넘볼 수는 없는 일이다. 작은 몸피로 큰일을 감당하는 야무진 자태에 서운하던 마음도, 짧은 순간 널뛰듯 오르내린 유치한 속내도 차츰 누그러졌다. 읽히는 책과 받침대가 되어주는 책, 어느 쪽이든 누군가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책장이나 책상 위 방바닥에까지 널려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풍경이었을 뿐 딱히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리 집에 오는 책들은 가엾기도 하지.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펼치지 않은 책들을 볼 때마다 넋두리 하셨다. 그러나 책에 묻혀 살지는 않았다 해도 그 언저리에서 자라온 덕에 여러 형제가 작으나마 제 몫을 하고 사는 게 아닐까. 할머니 눈에 들 만큼은 아니었어도 그것이 마음의 틀을 잡아준 굄대였다는 걸 이제 알겠다. 메주 틀을 받쳐 장맛을 달게 할 우리 책처럼.
그이는 해마다 메주를 쑨다. 내년에도 훈훈한 방에 메주를 띄우고 기분 좋은 날 전화를 걸어올 게다. 그때도 메주 틀을 받치고 있는 우리 책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도 누군가에게 굄대가 되어보렴. 큰 무게에 눌려 있는 책이 은근히 부추기는 것 같다.
■ 최 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