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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011. 12:01 NZ코리아포스트 (219.♡.51.194)
아름다운 세상
예수께서 ‘긍휼히 여기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이란 어떤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엘레에오’라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구체적인 행위를 뜻한다.
누군가가 침울해 보일 때 말을 걸어 준다든가, 말없이 그저 손을 꼭 잡아 준다든가, 내가 지닌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긍휼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인 부요함을 누리는 자만 베풀 수 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상대적인 빈곤감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긍휼을 베풀 수 없다. 가령 주급이 500불인 사람의 눈에 천불 수입의 사람만 보인다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다. 그러나 적은 소득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삶의 절대적인 의미, 절대적인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적은 수입 가운데 일부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나눌 수 있게 된다.
미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조카의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방학 중에 재해난민을 위한 모금을 학교에서 하게 되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취지를 설명하고 얼마든 후원금을 받는 일이였다.
친구와 함께 구역을 나누어 한인들이 모여사는 오렌지 카운티의 고급 주택 단지를 찾았다. 어느집의 벨을 누르자 집 주인이 나와서 재해를 당한이들의 고통스런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하였다.
며칠후에 다시 찾은 아이는 커다란 집에 잘 어우러진 인테리어에 정신이 팔려 입이 벌어졌다. 내심 모금이 좀 되겠구나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버릴 수 없는 기대감에 한참을 기다리던 아이의 손에 집주인 여자는 일불짜리 하나를 건네 주었다는 것이다.
힘이 빠졌다.
켈리포니아의 여름날, 햇볕이 더 뜨겁게 느껴지고 그리고 굉장한 것을 기대한건 아니였지만 축 쳐지는 어깨를 어쩔 수 없었다. 걸어서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걸어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혼자사시는 연로하신 교회 권사님을 만났다.
그녀는 지친 아이의 얼굴을 살피면서 “제니야~ 그렇게 피곤해 하면서까지 다니지 말아라~ ?” 하시면서 생각지도 않게 십불을 모금함에 넣어주셨다. 그것을 받아 드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는 것이였다.
그 마음으로의 격려, 그 따뜻한 마음이야 돈으로 비교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면, 그 동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 때문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긍휼인가? 주님께서 과거의 우리의 잘못을 묻지 않으셨다는 것과 나의 과거에 대한 편견으로 현재의 나를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늘 기다려 주시고, 져 주시고, 매번 내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고 믿어주시는 분.
그렇게 나를 믿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를 위해 죽으실 수가 있으셨겠는가?
그의 긍휼하심을 깨달은 자만이 베풀 수 있는 긍휼함.
그럴 수 있는자 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 그는 참으로 ‘복’ 있는 자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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