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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은 차를 닮았다. 봄눈이 눈을 가장한 물기라면 차는 푸른 이파리를 머금은 물이다. 여리 여리하고 순한 물. 내리면서 녹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봄눈처럼 몸에 들어가서 걸림 없이 흡수되는 차. 봄눈이 겨울의 우울을 녹여내고 봄을 피워내는 계절의 신비라면 차는 몸의 독을 씻어주고 마음에 봄을 꽃피우는 기적이다.
초봄, 푸르게 눈이 내린 백담사에서 차오름 명상을 만났다. 차오름 명상은 백담사 템플스테이 연수원장 백거 스님이 마련한 차 명상 프로그램이다.
제가 저를 구제한다고요?
“호흡 하나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하나는 구제해주는 것 같아요. 맑고 고요한 시간을 가짐으로써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뭘 하면 옳은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루 3분 호흡 명상을 하는 것으로 누구한테 묻지 않아도 나 하나 정도는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숨이에요. 숨을 깊게 마시고 길게 내쉬는 한 호흡. 온몸이 평화롭게 깨어나는 숨, 그 첫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백거 스님의 목소리가 마음에 닿아 종소리가 났다. 스님은 숨이 끊어지는 임사체험을 해본 것이었을까. 어쩌면 스님은 깊은 명상 중에 스스로를 구제하는 체험을 해본 것이 아닐까. 차오름 명상의 호흡법에 대해 설명하는 백거 스님의 목소리는 동그랗게 말린 찻잎이 찻잔을 굴러가는 듯 초롱초롱했다. 오래 아파본 사람, 자신이 치유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사랑을 베풀기로 원을 세운 이의 진심이 데구르르, 데구르르 전해져왔다.
찻잔에는 내가, 눈 속엔 봄이
찻물을 길으러 갔다. 봄볕에 눈이 녹아 백담사 경내에는 낙숫물 전주곡이 소란스러웠다. 하얀 도화지 위에는 수 천 개의 돌탑들이 목을 빼듯이 봄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절집은 마침 텅 비어 있었다. 한쪽 벽에 걸린 시와 선이 같다는 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와 차와 선이 한 가지로구나!
차오름 명상을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나와서 만해 기념관 앞에 있는 만해 선사의 흉상 앞에 서보았다. 그 아래에 아까는 눈에 덮여 보이지 않던 글이 그새 눈이 녹아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기루다’는 선사가 만든 말이다. ‘기다리다’와 ‘기르다’의 두 가지 뜻이 담긴 것 같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차오름 명상을 하면서 백거 스님의 말처럼 자궁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흰 수건을 뒤집어 쓴 채 차의 훈김을 호흡하면서 나는 한마리 어린 짐승이었다. 참 나를 기다리고 참 나를 기르는 나. 참 나를 ‘기루는’ 나.
뜨거운 찻물이 담긴 차오름기에 얼굴을 묻고 호흡을 하면서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것을 관찰했다. 차오름기 안에는 돌돌돌 말려 있던 찻잎이 천천히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차는 세 번 피는 것일까. 처음 차나무에서 피어나는 잎이 첫 번째. 그 잎을 따 정성스레 덖어서 도르르 말린 차에 따듯한 물을 부었을 때 본래의 잎 모양으로 피어나는 것이 두 번째. 마지막은 그 차를 마셨을 때 입 안에서 식도를 지나 저 위장 안쪽까지 흡수되었다가 호흡과 함께 온몸으로 피어나는 차의 기운이 세 번째.
그렇게 차의 성정과 교감하고 따듯한 차의 훈김을 몸속으로 들여보내 온 몸을 정화해서, 마음의 탐진치를 씻어내는 애씀이 차오름 명상이었다.
다시 들어가 본 자궁, 그 안에 거울이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내가 나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내가 나에게 뜻밖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힘내!
찻잔 속에 내가 있듯이 봄눈 속에 봄이 있었다. 하다만 이야기 같지만 그걸로 충분한 봄눈처럼. 차 향기, 숨소리, 잔설, 낙숫물……. 해묵은 나와 헤어지고 새로운 나로 차오르는 흐뭇한 별리의 계절. 진정으로 사는 것처럼 꼭 한 번 살고 싶은 마침내 봄이다.
HOW TO 차오름 명상
건강, 행복, 참 나가 차오르는 차 명상
차오름 명상은 건강도 차오르고, 행복도 차오른다는 뜻을 담은 차 명상 프로그램이다. 차오름 명상에 사용하는 차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발효차로 한다. 기본자세는 두 발의 복 숭아 뼈가 만났을 때 아주 편안한 지점을 찾아서 바르게 앉는 것이다. 차오름 명상 중에 자세가 불편하면 언제든지 다리를 편다든지 해서 편한 자세로 바꿔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1. 차 받기
한 손으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다른 손 손바닥을 오목하게 해서 차를 붓는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동글동글한 차를 만져본다. 차가 딱딱한지, 따듯한지 느껴본다. 코에 가져가 냄새도 맡아본다.
2. 차 떨어뜨리기
차가 차오름기에 떨어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귀 기울여들어본다. 한순간에 떨어지기 때문에 소리를 놓칠 수가 있으니 귀를 쫑긋 세워서 집중해야 한다. 하나, 둘, 셋! 차오름기는 흙으로 빚어서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3. 차수건 두르기
흰색 차수건을 넓게 펼쳐서 어깨에 두른다. 차수건은 차의 훈김이 세어나가지 않게 하고, 몸을 덮어줘서 차오름 명상에 더욱 집중하게 해준다. 처음에는 어깨까지 덮고, 나중에는 머리까지 폭 뒤집어쓴다.
4. 차오름기에 물 붓기
팔팔 끓인 물이 담긴 보온병을 가슴 높이에서 조심스럽게 기울여 차오름기 안의 나뭇잎이 살짝 담길 정도까지 천천히 붓는다.
5. 차오름기에 얼굴 묻기
차오름기의 손잡이에 한쪽 손의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넣어 엄지와 함께 고정시켜 잡고, 나머지 두 손가락으로 받 쳐준다. 다른 손으로는 차오름기를 안아준다. 평안한 자세로 차오름기에 얼굴을 묻는다. 호흡을 통해 장기로 따뜻한열기를 들여보낸다. 뜨거운 기운이 힘들게 하지 않으면 차수건을 머리 위까지 덮어준다.
6. 호흡하기
숨을 깊게 마시고 길게 내쉰다. 깊게 마시는 호흡에 복부가 팽창되는 것을 느끼고, 길게 내쉬는 호흡에 복부가 수축되는 것을 느낀다. 숨은 배꼽에서 손가락 세 마디 아래까지 내려 보낸다. 호흡 중에 다리가 불편하면 알아차리고 언제든지 편하게 자세를 고쳐도 괜찮다.
7. 온몸 이완하기
따뜻한 차 한 방울이 정수리, 얼굴, 가슴, 온몸에 스며들면서 긴장이 풀리면 편안하다, 편안하다, 편안하다고 느낀다. 따뜻한 차의 기운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스며들면서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 편안하다, 편안하다, 편안하다고 느낀다.
8.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차오름기의 따뜻함을 느낀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따스함을 느낀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미움, 시기, 질투도 없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맑은 영혼이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와 다르게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인지 살핀다. 숨을 마시고 내쉬는 중에 떠오르는 영상이나 생각을 살핀다. 살아오면서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피고, 지금 나의 호흡은 고른지 맥박은 잘 뛰고 있는지 아무 일 없는지 살핀다.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살핀다.
9. 나는 누구인가? 묻기
차 한 방울의 기운을 깊게 마시고 길게 내쉬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묻고 또 물어본다. 복부가 팽창되고 수축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묻고 또 물어본다. 자신만의 대답을 찾을 수 있도록 묻고 또 묻는다.
10. 차에 비친 자기와 마주하기
차오름기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동자를 천천히 떠서 오른쪽으로 네 번, 왼쪽으로 네 번 움직여 준다. 눈동자를 상하좌우로 움직여 준다. 차오름기 안의 찻물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다시 한 번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찬찬히 들여다본다.
11. 서서히 깨어나기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 호흡을 고른다. 발을 쭉 펴고 천천히 발가락을 움직여 준다. 기지개를 펴듯 손바닥을 천정으로 향해서 쭉 편다. 양팔을 가슴 높이에서 어깨넓이로 벌리고 엄지를 안으로 넣은 채로 네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100회 한다. 같은 자세로 손을 뒤집어서 100회 하는데, 이번에는 엄지도 같이 폈다 오므렸다 한다. 힘들어지면 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웃는다. 양손을 앞으로 뻗어서 꼬아 잡고 팔을 안에서 밖으로 뒤집어 쭉 편다. 반대로도 한다.
12. 차 마시기
자기와 명상을 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차를 찻잔에 따른다. 처음에 코로 가져가서 냄새를 맡아보고, 입술에 가져가서 찻잔과 입술의 부딪침을 느껴본다. 차 한 모금을 머금고 입 안 곳곳으로 차의 맛을 느껴본다. 천천히 삼키면서 시원하게 목안을 타고 내려가는 차를 음미한다.
13. 몸에 차를 먹여주기
남은 차를 몸에 바른다. 손에 찻물을 적셔서 얼굴에 두드리면서 먹여준다.
※ 주의할 점과 참고 사항
차오름 명상은 처음 100일 정도는 하루걸러 이틀에 한 번 하는 것이 좋다. 갑자기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릇이 깨어지는 것처럼 몸에 명현반응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날마다 해도 괜찮다. 차오름 명상은 인제 백담사와 천안 제화사 템플스테이에서 체험할 수 있다.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