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분 후 트랙 시작점에 도착했는데, 함께 도착한 할머니 6명은 험프리지 트랙이 아닌 근처의 별장에서 하루 묵고 돌아가신다고 한다. 트랙 시작점은 바로 민가에 자리잡고 있지만, 트랙이 지나는 숲은 나무의 밀도가 높아 숲속이 컴컴하다. 숲속에는 여러 가지 식물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구린내 나무(Stink wood)'라는 표시가 있는 나뭇잎을 손으로 비벼 보았더니 정말 심각한 냄새가 난다.
약 40분 정도 걸었더니, 시원한 바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발자국 하나 없는 광활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일행과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데, 그의 어깨 너머 바다에서 돌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오른다. 나도 모르게 “돌고래다!”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다시 튀어 오르지 않아 왠지 머쓱해진다.
바다를 자세히 보니 수면 위 여기저기서 검은 점들이 일렁인다. 바로 돌고래들의 등지느러미다. 그 중 몇몇 돌고래는 바로 앞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온다. 바다 돌고래 중 가장 작고(1.2m) 가장 희귀한 헥터 돌핀들이 눈앞에 잔뜩 있다. 1시간 이상을 보고 있었지만, 돌고래들이 오히려 우리를 보려는 듯이 얕은 바다로 나온다.
몇 개의 큰 구름다리를 지나 내륙으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는 길이 4~5m는 될 듯한 죽은 파일롯 고래가 파도에 밀려와 있다. 내려오는 날 지역 신문에 이 고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본 것은 죽은 지 4일째 된 것이었다.
몇 개의 다리와 마오리족의 땅을 지나고 나니, 피요르드랜드 국립공원이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숲과 오르막이 시작된다. 숲의 최상부인 캐노피 부분은 너도밤나무가, 그 주변에는 양치류 식물이, 그 밑에는 난과 식물, 마지막으로 땅 위와 죽은 나무에는 이끼류가 붙어 한 가닥의 태양빛도 낭비함이 없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
수백만 년 동안 쌓여온 땅은 트래킹 하기 알맞게 푹신거려 단단한 매트리스 위를 걷는 것처럼 걸음이 경쾌하다. 땅이 약간이라도 질거나 주변의 자연 상태가 미묘한 곳은 여지없이 나무로 데크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깊은 피요르드랜드의 숲임을 증명하듯이 시내를 흐르는 물빛은 홍차색을 띠고 있는데, 이 색은 숲의 흙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음료수로 사용해도 아무 문제 없다.
숲속의 세 번째 다리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릇이 끈에 매달려 있다. 이곳부터가 본격적인 오르막의 시작이다. 오후 2시가 금방 지난 시간이지만, 숲은 깊고 두터워져 완전히 태초의 모습 그대로다.
약 3~4시간을 올라가고 나니 짙은 구름에 시계가 10m도 되지 않는다. 수목한계선(높은 고도로 인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 경계선)을 넘자 갑자기 밝아지는데, 이 곳에서부터 오늘의 숙소인 오카카 산장까지는 아직도 1시간 가량 더 가야 한다. 이곳부터는 본격적인 고산지대라서 작은 관목조차도 살기 어려워 전형적인 고산 식물들만이 땅위를 덮고 있다. 같이 동행한 손세호씨는 잘 보존된 고산 습지를 보고 연신 탄성을 지른다.
오후 6시, 드디어 도착한 산장은 산장이라기보다 차라리 고급 별장에 가깝다. 수세식 화장실에 가스히터, 태양열을 이용한 전등에 온수까지 뉴질랜드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다. 총 4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산장에서 산장지기 니콜을 포함하여 우리까지 단 4명만이 오늘밤을 지내게 됐다.
남위 46도를 넘는 이 지역은 낮이 워낙 길어 밤 10시30분이 지나서야 완전히 캄캄한 밤이 된다. 산장지기 니콜이 내일 아침에 포리지(porridge-오트밀을 끓여 우유와 흑설탕과 더불어 먹는 스코틀랜드식 아침식사)를 무료로 준비해 주겠다며 함께 먹자고 제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