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엔더비섬(Enderby Island)을 일주하는 날이다. 엔더비섬은 뉴질랜드에서 자연생태의 보고인 곳이다. 하나의 커다란 생태 박물관을 방불케하는 이 커다란 섬을 직접 대하고 보니 내 상상력이 얼마나 경직되고 판에 박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조디악으로 갈아탄 후, 섬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준비해온 장화를 신고 등산화를 목에 걸고, 구명조끼와 함께 해변의 바위 위로 뛰어올라야 했다. 입도하기가 편하지 않은 상황이고, 바위 위에는 미끄러운 켈프(kelp-다시마처럼 생긴 대형 해초류)가 잔뜩 있어 걷기 쉽지 않다. 섬 입구에서부터 켈프에 붙은 작은 벌레를 먹으려고 로빈새가 부산스럽게 날아다닌다.
바위를 돌아가자 앞에 널찍한 모래사장이 나오는데,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던 바다사자의 고함소리가 코너를 돌자 큰 소음으로 들려왔다. 하렘(한 마리의 우두머리 수컷과 암컷 수백 마리가 이루는 무리)을 이룬 바다사자와 조금 큰 베개만한 귀여운 아기 바다사자들이 모래사장에 가득 박혀 있고, 무리 중 암컷에 다가가려고 주위에서 집적거리는 수컷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 아침 8시 조금 전이다.
■ 샌디 베이~이후푸쿠 베이
장화와 구명조끼를 벗어 DOC(자연보호국)의 조그만 창고에 넣고서 출발 준비를 한다. 이 섬에는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보호국 직원 2명만 살고 있는 작은 건물 한 채가 있다. 섬에 거주하는 일반인은 없다.
자연보호국 건물 옆으로 나 있는 숲길을 걷기 시작하자, 가슴까지 오는 숲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던 바다사자가 여기저기 고개를 든다. 서로 애써 무관심해 하며 그 옆을 지나는데 흘깃흘깃 바라보는 표정이 재미있다.
까칠한 작은 나무 밑에서 갑자기 꽥~ 하는 소리가 난다. 밑을 들여다보니 서던 스큐아(skua-도둑갈매기) 어미와 새끼가 있다. 커다란 독수리 같이 생긴 이 새는 잡식성으로, 다른 새들의 알이나 새끼, 바다사자의 태반 등을 먹기 때문에 섬의 다른 새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허리를 굽혀 겨우 걸어 들어간 낮은 관목숲을 지나면 아름다운 벌판이 펼쳐진다. 좌우에 작은 마누카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초본류 식물이 사방에 펼쳐진다. 긴 보드워크(나무판자 길)를 완전히 일직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섬 남쪽 해변에서 출발하는 이 길의 끝은 벼랑으로 이루어진 북쪽까지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알바트로스 둥지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이전에 보았던 서던 로열 알바트로스(Southern Royal Albatross)가 아니라 원더링 알바트로스(Wondering Albatross-날개길이 최대 3.5m)다. 거의 모든 모습이 서던 로열 알바트로스와 비슷하지만, 정수리 부분에 검은 얼룩 같은 깃털이 나 있고, 다른 알바트로스가 없는 호젓한 곳에 둥지를 짓는 고고한 녀석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날개를 펴며 위협한다.
이곳에서 길은 그야말로 소실점이 보이는 곳까지 열려 있다. 그 앞은 짙푸른 대양이 끝없이 펼쳐져 가슴 트이는 ‘무한'을 느낄 수 있다. 한참을 걸어간 보드워크 끝부분에 한 무리의 꽃이 만발해 있다. 향이 진하지 않은 이곳의 꽃씨들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싹이 되고 길어진 가지가 팔을 벌리면, 그 끝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어 또 땅에 떨어진다. 이렇게 씨가 날지 못하고 제자리에 떨어지는 식물들은 좁은 공간에 매우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 영역이 확대되지만, 워낙 밀도가 높아 오랜 세월이 흐르면 빽빽하게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