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가 넓어지며 바다가 나오는데 내가 나온 라타 숲은 센 바람을 이기기 위해 키가 2m가 넘지 않으며, 작은 가지와 잎이 서로 엉키고 뒤틀려 있다. 이 숲이 작은 새들에게 아늑한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이 숲은 천혜의 피신처로서 도둑갈매기 같이 큰 새가 올 수 없는 좁고 긴 미로를 만들어 톰팃, 로빈, 패럿 등의 아름다운 새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지도를 보니 어느덧 섬 동부에 와 있다. 길이 없는 바닷가를 걸어가노라면 동그란 참호같이 파여 있는 장소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바다사자들이 오랜 동안 한 곳에서 몸을 부비며 살아서 만들어진 안식처다. 아까 쫓아오던 바다사자 생각 때문인지 평화롭게 누워있는 바다사자들이 고개라도 들면 머리칼이 쭈뼛쭈뼛 선다.
*** 호이호 크릭 ***
호이호 크릭은 지도에 명기되어 있는 이름만으로 이곳에 옐로 아이드 펭귄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닷가로 연결되는 작은 시내 좌우로 숲이 있으니, 그냥 보기만 해도 이곳이 옐로우 아이드 펭귄의 서식지로 최적임을 알 수 있다. 바다쪽을 보니 그 희귀한 펭귄 10여 마리가 너무나 평범한 모습으로 바위에 앉아 있다.
펭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약하고 귀여운 이미지와는 판이한 점이 많다. 밀도 높은 물을 헤쳐 나가는 강력한 앞날개와 강한 발, 며칠씩 바다를 누빌 수 있는 지구력과 강한 목근육 끝에 있는 강력한 부리, 그 목근육을 지탱하는 두터운 몸통은 육지에서도 웬만한 싸움에 견딜 수 있는 강함의 원천이다.
실제로 뉴질랜드 본토에 사는 키 20cm가 겨우 넘는 시끄러운 블루 펭귄은 다 자란 집고양이와 싸워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육체적인 자신감 때문인지 옐로 아이드 펭귄은 카메라 다리를 세워 사진을 찍는 나를 가끔 한 번씩 쳐다만 볼 뿐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보는 내가 무안한 생각이 들어 조용한 이 친구들 곁을 조심스레 떠났다. 이때부터 본 옐로 아이드 펭귄은 거의 50마리가 넘는다.
이곳 바닷가에는 표류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아마도 육지와 너무 먼 까닭일 것이다. 섬 남단에 있는 틸 레이크(Teal Lake)의 정적은 조용한 오후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옆에서 조는 작은 오리들은 분명 누군가가 꾸며놓은 아름다운 정원의 한쪽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벼랑 끝에 나 있는 숲을 지나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바다사자의 하렘은 내겐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곳이다. 어른 머리는 충분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입을 벌리고 소리 지르며 쫓아오던 바다사자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렘 주변에는 암컷과 교미를 원하지만 할 수는 없는 젊은 수컷들이 신경질적인 상태로 누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없이 마음이 불편하다. 누군가 오길 한참을 앉아 기다리니 미국 아가씨인 에이미가 온다. “여자 혼자는 위험하니 내가 같이 가주지”하며 에이미에게 말을 건넸더니 반갑게 “신사”라며 고맙다고 한다. 에이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하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엔더비 섬에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아늑한 곳이면 어디든지 뭔가가 살고 있다. 따스한 잔디밭 위에는 뻔뻔한 도둑갈매기의 둥지가, 작은 시내가 흐르는 숲속과 해변은 펭귄이, 널찍한 모래사장에는 바다사자, 관목 숲속에는 작은 새들, 바닷가의 바위에는 켈프와 전복이 가득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제로섬(Zero Sum)이라 누군가 웃으면 어디선가 울고, 누군가 벌면 한쪽에서는 손해를 보지만, 무한한 사랑이 제공되는 자연은 다른 곳이다. 모두에게 풍족하도록 먹을 것이 제공되며, 모든 동물의 숫자는 평형이 맞아 계속 안정된 수를 유지하고, 집이 없어 잘 곳 걱정하는 동물이 없다.
너무도 외딴 곳이라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곳 동물들은 모두 평화롭고 즐겁게 살고 있다. 가끔 날아올라 어미 새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도둑갈매기가 평화를 깨는 듯이 보여도, 이 녀석은 섬에서 너무 증식되는 종의 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섬에서 필름을 다 쓴 후에야 섬을 떠났다. 조디악을 타고 배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주위를 돌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50~60마리가 넘는 돌고래들은 배 좌우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고, 우리가 배에 옮겨 탄 후에도 30분이 넘도록 우리 곁에 있었다. 카메라 속에 마지막 한 장의 필름도 없이 다 찍어버린 내 자신을 후회했지만, 정말 감동적인 이 마지막 장면은 필름이 아닌 내 망막에 찍어 머릿속에 각인시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