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오래된 영미 불문법에는 maintenance와 champerty 라는 개념이 있다. 역사를 뒤돌아 볼 때, 부유한 개인이 자신의 정적(政敵)이나 경쟁자에게 경제적 또는 정치적인 타격을 주고자 제 삼자를 통하여 소송을 거는 행위가 존재했다고 한다. 즉 예를 들어, A라는 재력가가 자신의 경쟁자인 B에게 타격을 주고자 B와 상업적 계약이 있는 C나, B의 고용인인 D등을 사주하여 B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형식이다. 이 때 B는 C나 D의 소송이 근거가 없음을 알고도 소송에 대한 변론으로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게 되고, 비우호적인 여론으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 할 수 있다.
이런 비도덕적인 소송을 막기 위해, 영미 불문법은 전통적으로 maintenance라는 개념을 통하여 개개인의 소송 관련 비용을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조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제 3자가 개개인의 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분배 받는 것 역시 champerty라는 개념을 통해 금지한다. 예를 들어, C가 B에게 소송을 제기 하는데, 이와 관련된 모든 비용은 A가 부담하는 대신, C가 승소하여 배상금을 받게 되면 A가 배상금의 일부분을 수익으로 받는 형식이 champerty에 해당된다.
요즘 언어로 바꿔서 풀어보면 maintenance와 champerty는 이익 분배의 특약 조항이 있는 소송의 대리 또는 소송 자금의 원조(援助) 정도가 될 듯 하다. Maintenance와 champerty는 소송과 법률제도의 악용으로 간주 되고, 전통적으로 터부시 돼왔는데, 20세기 후반부터 집단 소송이 증가하는 등, 법률시장의 변화에 따라 maintenance와 champerty는 (여전히 권장 되지는 않지만)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몇 진보적인 국가에서는 소송 비용을 부담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사설 소송펀드가 운영되고 있다. 얼핏 들어보면 소송 비용을 조달 할 수가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자비로운 성향의 펀드인듯 하지만, 이러한 소송 펀드들은 본질적으로 수익을 위해 운영되는 사업체이다. 즉, 소송 당사자가 아닌 자들, 즉 출자자들이 펀드를 만들어 자금을 투자하고, 소송 자금을 원하는 사람들의 법률 비용을 분담한다. 그리고 소송에서 승소하거나 화해를 통하여 배상금 또는 화해금이 지불되는 경우에는, 소송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이 일정한 비율로 배당금을 받게 되는 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보통 배상금의 1/3 전후의 비율로 소송 펀드의 출자자에게 돈이 지급되고 있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모든 것이 그렇듯, 비교적 작은 규모로 인해 현재‘법률시장’에서 소송펀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뉴질랜드 법조계는 국가의 특성과 전통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호주와 캐나다와 같은 행보를 보이곤 하는데, 이웃한 호주에서는 소송의 대리와 소송 자금의 원조가 불법이 아니다. 따라서 소송펀드도 존재하고, 성공적으로 집단 소송을 진행한적도 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역시 영국법을 기반으로 하는 홍콩에서는 소송의 대리와 소송 자금의 원조가 불법이기에 소송펀드가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개인 입장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소송 자금을 원조/투자 하는 사람은 중한 징계/처벌을 받게 된다.
뉴질랜드에서는 아직 소송의 대리와 소송 자금의 원조에 대한 명확한 판례가 내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호주의 소송 펀드를 통해 (뉴질랜드) 원고인들이 성공적으로 소송 자금을 조달한 전례가 있고, 요즘 들어 호주의 판례에 높은 의존도를 보이는 뉴질랜드 법원을 볼 때, 소송의 대리와 소송 자금의 원조 역시 호주처럼 인정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또한 소송 펀드가 뉴질랜드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부터 뉴질랜드 역시 미국처럼 무분별한 소송의 남용으로 법률제도가 홍역을 치르게 되는건 아닐런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