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흘린 채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방관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몇 주 전 미국 버지니아주 한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의 CCTV에 찍힌 영상이다.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을 아랑곳 하지 않고 쇼핑 백을 들고 지나가는 여자, 그 옆에서 몇 초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버스를 타는 사람들. 여러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보이며,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타인간의 문제에 개입되지 않으려 하는 인간의 심리, 그리고 특히 주위에 목격자가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현상을 방관자 신드롬이라 한다.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이 줄어들어서 결국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방관자 신드롬은 1964년 키티 제노비스 살인사건을 계기로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는데, 제노비스의 살인사건은 요즘도 간혹 언론을 통해 회자되곤 한다.
1964년 뉴욕, 일을 마치고 새벽에 집으로 귀가하던 제노비스는 괴한에게 공격을 당한다. 괴한의 칼에 찔린 제노비스는 ‘칼에 찔렸어요 도와주세요’하고 소리쳤고, 창문 너머로 ‘그애를 놔줘’하고 소리친 동네 주민 덕분에 괴한은 도망친다. 하지만 괴한은 10여분 후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쓰러져 있는 제노비스를 수 차례 칼로 찌르고 폭행한다. 결국 제노비스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뉴욕의 밤거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잊혀질 수도 있던 이 살인사건은 한 언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보도된 언론자료에 의하면 주위에 38명의 사람이 이 사건을 목격했지만 이 여성을 도와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언론보도가 어느 정도 과장 되었다는 지적이 있지만, 사건을 목격한 동네주민 여럿이 피해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살인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은 없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외침을 듣고도 외면한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는 별개의 문제인 듯 하다. 키티 제노비스의 살인사건 이후 방관자 신드롬에 관련된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법들을 통틀어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 부른다. 성경/성서의 누가 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비유하여 만들어진 이름인데,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 할 수 있다.
먼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 있고, 이와 별개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다가 본의 아니게 법을 위반하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법이 있다. 첫 번째 종류의 법의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을 범죄로 간주하여 2년에서 6년까지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두 번째 종류의 법의 예로는 캐나다 법을 들 수가 있는데, 온타리오 주의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는 보수를 바라지 않고 타인에게 구급조치를 행한 사람은 구급조치를 취하면서 일어나는 과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라는 조항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피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괜히 좋은 일 하려다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뉴질랜드 국적인 두 사람이 호주의 골드코스트를 여행하던 중, 피를 흘린 채 쓰러져있는 사람을 보고 달려가서 응급조치 하였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로부터 가해자로 오인 받은 두 사람은 강압적으로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공무집행 방해죄로 체포되었던 이 두 사람은 곧 후속 조치 없이 풀려났으나, 경찰로부터 딱히 사과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뉴질랜드에는, 본인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의 생명과 후생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언정, 일면식 없는 타인의 곤경을 보고 도와줘야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