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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2010. 15:02 NZ코리아포스트 (219.♡.23.25)
뉴질랜드 여행
허정 PD, 드디어 도착하다
기다림이란 좋은 거다. 그것도 좋은 선물을 가득 들고 온다면 얼마나 좋은가. 오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현재를 즐겁게 해준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의 두근거림은 소풍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짝사랑하던 여학생과 처음 만나기로 한 날, 미리 나가 주위를 서성이는 가슴떨리는 기다림으로 우리는 허 PD(의 식품)를 기다리는 중이다.
어느덧 캠퍼밴 생활을 시작한 지 20여 일, 그동안 계속 졸병 역할을 했었는데 드디어 신병 허 PD가 온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서 우리는 서로 몸을 기댄 채 입국자들이 나오는 자동문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곧이어 저쪽 멀리서 낯익은 네모 얼굴의 허 PD가 짐을 잔뜩 가지고 나오고 있다. 보조개 미소의 노총각 허 PD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짐을 실은 카트를 끌고 캠퍼밴으로 향한다.
풀어헤친 허 PD의 짐보따리는 우리를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창란젓, 명란젓, 조개젓 등의 각종 젓갈류에 전라도 토종 된장, 총각김치, 신 김치, 겉절이, 생김치, 김과 멸치, 게다가 맛이 깊게 밴 마늘장아찌와 고추절임과 갓김치까지.... 허 PD가 가지고 온 구호물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양과 질과 종류였다. 상하지 않는 장아찌 종류는 싱크대 아래의 수납장에, 무게가 가벼운 멸치와 김과 젓갈은 상부 수납장에다 정리해 놓고, 각종 김치 종류는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게다가 이동 중에 슬쩍 건넨 허 PD의 한마디에 난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형님들 모시느라 힘드셨죠? 내일부터 음식, 설거지, 운전, 청소 제가 다 할께요.”
신병 허 PD를 태운 캠퍼밴은 남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73번 도로 중 맘에 드는 곳을 만나면 아무 곳에서나 차를 세우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긴 평원지대를 지나서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이 계속된다. 산속에 숨어 있어서 산모퉁이를 돌기 전까지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에 있는 피어슨 호수(Lake Pearson)를 보자 이구동성으로 이곳에서 야영을 하자고 한다. 호수의 북쪽 끝에 캠프장이 마련되어 있어 캠퍼밴을 세우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 서 있는 곳과 호수의 거리는 불과 2~3미터, 호숫가에는 나무들이 가지런히 있고 주위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시설도 없다. 호수는 계곡과 달리 수량이 순식간에 불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차를 호숫가에 바짝 주차할 수 있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시작해서 서쪽의 쿠마라 정션(Kumara Junction 고구마 갈림길)에서 끝나는 73번 도로는 뉴질랜드의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다.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캔터베리 대평원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포도주 농장을 지나 호수와 동굴과 기암괴석과 스키장과 만년설의 산과 폭포와 서던 알프스의 장엄함과 골드러시의 역사까지 줄줄이 늘어선 73번 도로에는 갖가지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그 아름다움의 심장부에서 캠퍼밴을 세우고 하루만 묵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경치다. 새로운 일행의 도착으로 들뜬 우리는 허 PD가 가져온 풍족한 밑반찬과 김에 흰 쌀밥을 산더미처럼 지어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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