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사납게 불어도 비만 오지 않으면 강가로 여행을 떠난다. 겨울비로 불어난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지만, 그 소리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요즘 나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 같다.
에스페레네드 공원 끝자락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산책 준비를 끝냈다. 몇 겹의 옷 위로 패딩조끼를 걸치고 방한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내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연상케 할 수도 있었겠다. 오미클론도 독감도 이렇게 중무장한 나를 덮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에스프레네드 공원의 가보지 않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양쪽으로 줄을 서서 서 있는 나목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고, 나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씩씩하게 그곳을 지나갔다.
나목들이 줄 서 있는 그곳이 봄이 되면 연둣빛으로 변하여 여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녹음이 우거질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거 없이 예쁜 옷을 갈아입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우리들에게 커다란 쉼터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나목들을 뚫고 내려온 햇볕에 데워진 몸으로 좁은 숲길로 들어가니, 반짝이는 푸른 잎들을 머금은 나무들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이 보였다. 불어난 강물은 힘차게 흘러갔고, 나뭇잎 사이로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숲길은 사이클링을 위한 길인 거 같았다. 길고 좁은 숲길이 열리자 넓은 잔디가 놓여 있었고, 잔디 위에 자전거 바퀴가 만든 가는 직선이 그어져 있었다. 자전거들이 지나가면서 만든 좁은 길. 그 길을 따라 보이는 것은 차가 안 다니는 다리. 내가 건너갈 다리였다.
마오리 문양이 바닥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다리이다. 그 다리를 지나면 소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데, 소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오리들의 작은 놀이터를 다녀오는 것이 오늘의 여행길이었다.
정겨운 길. 한국의 시골길처럼 편안한 소나무 길을 걸으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들판 저 멀리 우뚝 혼자 서 있는 나무가 엽서를 옮겨 놓은 듯 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억새들의 무리가 반갑기만 하다.
억새를 보면서 여우꼬리 같다고 한 친구가 있다. 여우가 억새로 둔갑하여 서 있다가 밤이면 요술을 부릴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해서일까? 워낙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라서 여우꼬리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지오그라피 동영상에서 본 하얀 눈 위의 흰여우가 생각이 났다. 고양이만한 흰 여우가 사냥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갑자기 몸을 하늘로 뛰어 올라 재주를 넘듯이 수직 하강하여 눈 속에 있는 쥐를 잡아먹고 있지 않은가? 사냥도 그렇게 귀엽게 하니, 여우한테 홀린다는 말이 거저 나온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억새에게 안겨 있는 소나무를 지나가자, 뿌리가 부려진 채 강을 향해 누워 있는 소나무를 보았다. 지난 비바람에 뿌리와 연결된 부분이 꺾여서 쓰러진 거 같다.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편히 쉬고 있으리라. 오랫동안 거센 바람을 견디면서 사느라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능성이에는 풍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멋진 풍광이다.
바람의 도시 파미답게 북섬의 90% 이상 전력을 생성해내는 윈드팜 때문에 오리들이 시련이 많았다. 지금은 오리들이 풍차 날개에 부딪혀서 떨어져 죽지 않고, 가려는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잘 다닌다고 하니 다행이다. 철새인 오리들이 풍차 때문에 얼마나 힘든 여행을 하였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요즘 나는 만보 이상의 걸음을 요구하는 여행을 한다. 몸이 많이 좋아졌는지, 만보의 여행이 힘겹지가 않다. 만보를 걷는 내내 자연의 변화에 눈길이 가고 그것들을 통해 사색을 하게 되고, 몸과도 대화를 나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교정하기엔 맞춤 운동인 걷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집 비앤비 손님들 중에 걸어서 뉴질랜드 여행을 하는 손님이 있었다. 미국에서 온 손님인데, 북섬 끝에서부터 산을 타면서 걸어서 왔다고 했다. 남섬 끝까지 완주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의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겸손한 모습이었다.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분처럼 그렇게 길고 험한 여행은 할 수가 없다. 그저 만보의 여행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만보 여행도 나에겐 크나큰 행복을 안겨다 준다. 삶에 대한 희망이 용솟음친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하고, 마음 또한 넓게 해준다.
파미에 20여년을 살면서도 파미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가던 곳만을 다니면서 지내왔다.
이제는 가보지 못한 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지내려 한다. 아주 평범한 시골길을 걷는 것부터 공원들과 산책길 구석구석을 다 다녀볼 생각이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를 다니면서 자연과 교감을 한 것처럼 나도 파미의 자연과 교감하면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당분간은 마나와투 강변의 정취에 취해서 발길이 그 주위로만 움직여지지만, 강변 산책이 지겨워지면 다른 산책로를 찾아 길을 떠날 거 같다.
소로우의 ‘월든’을 읽고 월든 호수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나 또한 ‘월든’호수에 한 번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월든에 가보고 싶은 만큼 내가 사는 파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다.
그 어디든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그곳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파미의 겨울을 사랑하게 된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이제껏 비바람이 센 파미의 겨울을 얼마나 싫어했었던가? 춥고 습한 겨울이 어서 가기를 바라면서 지냈었다만, 지금은 겨울 햇살을 즐기러 밖으로 나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사랑의 힘이려니.
삶의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자전거여행이든 도보여행이든 그 어떤 여행도 우리에게 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일주일 후면 두 딸들과 함께 유은이의 첫돌을 축하해주러 오클랜드에 간다.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 여행이라서 마음이 들뜬다. 오랫동안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도 못했는데, 유은이 덕분에 세 모녀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3박 4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알차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거 같다. 여행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만끽하고 오기를 소망한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