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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락사 여거 스님
경기도 용인에 있는 극락사는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뒤로는 구봉산이 듬직하게 감싸고, 옆으로는 실개울이 흐르는 그림 같은 풍경은 풍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자리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이 곳의 주지인 여거 스님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사찰음식 강의로 유명하다. ‘제철 재료로 만드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는 이 산과 들에서 얻는 풀과 열매, 꽃으로 사철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낸다. ‘계절을 요리한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거 스님에게 사찰음식은 자연, 그 자체다.
극락사의 봄은 여거 스님의 바구니에서부터 온다. 봄기운이 느껴진다 싶으면 바구니 하나 챙겨 들고 들로, 산으로 나선다. 요즘은 쑥, 홑잎, 민들레, 돌나물 등 지천에 먹을거리가 널려 있어 잠깐만 나갔다 와도 금방 바구니가 찬다. 그중에서도 여리고 부드러워 한창 먹기 좋은 쑥은 봄철 가장 즐겨 먹는 식재료다.
“벌써 쑥국을 몇 번이나 끓여 먹었는지 몰라요. 다른 재료 필요 없이, 쑥에 된장 하나만 풀어서 끓이는데도 참 맛있어요. 쌀가루에 소금, 설탕을 넣어 쑥과 버무려 찌는 ‘쑥털털이’도 좋아하고요. 찹쌀이랑 섞어 밥하듯이 해서 만드는 쑥인절미는 간식으로도 좋고, 식사 대용으로도 먹기 편해 사찰음식 강의 때 많이 추천하는 음식이에요. 요즘은 ‘밥알 인절미’라고 해서 많이 치대지 않고, 밥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도록 해 만들기가 더 쉬워졌어요.”
쑥이 질겨질 때가 되면 삶아서 방앗간에 가져간다. 곱게 빻은 쌀과 쑥을 반죽해 냉동실에 넣어두면 언제든 쑥떡을 만들 수 있어 요긴하다.
즙을 내 수제비 반죽에 쓰기도 하고, 덖어서 차로도 만든다.
“쑥은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대표적인 식재료에요. 몸의 온도가 높아지면 혈액 순환이 잘 되고, 면역력이 좋아집니다. 예전에 어른 스님들이 ‘쑥개떡 세 번은 먹어야 잔병치레를 안 한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인 것 같아요.”
제철 재료 지천인 산사(山寺)에 사는 즐거움
극락사에 온 지 꼭 1년, 여거 스님은 이곳을 ‘고향 같은 곳’이라고 부른다. 직접 농사도 짓는다. 텃밭에는 쌈야채나 겉절이로 먹을만한 푸성귀에서부터 가지, 오이, 고추, 무, 배추 등을 종류별로 심어 가꾼다. 대부분 자급하다 보니 봄부터 가을까지 시장에서 사 먹는 찬거리는 콩나물, 버섯, 두부 정도다.
“극락사에 처음 왔을 때가 2014년이었어요. 노스님이 입적하신 뒤 비어 있는 상태에서 소임을 받아 왔는데 절 주변에 손봐야 할 게 많았어요. 수도 시설도 없더라고요. 이런저런 것들을 직접 고치고 만들어 가느라 힘은 들었지만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좋았어요. 몇 년 뒤 서울의 소림사 주지로 갔다가 작년에 다시 왔어요. 여기가 너무 좋아서, 강의하러 서울에 갔다가도 바로 와요. ‘오늘은 또 뭐가 나왔을까’ 궁금해하며 산에 오르는 재미가 제일 크죠. 산이 제 놀이터예요(웃음).”
울진 불영사에서 시작한 행자 생활
여거 스님은 21년 전, 비교적 늦은 나이인 31세에 출가했다. 불자인 부모님 덕분에 일찍부터 절과 친숙했던 그는 열아홉살 때 화성 용주사를 찾았다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다른 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자신을 감싸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부터 용주사 청년 불자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한자로 된 불경을 외우고, 일일이 옥편을 찾아가며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깨닫는 재미가 있었다. 마침내 확신이 생긴 그는 어느 스님의 소개로 울진 불영사의 행자가 되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머무는 천년고찰 불영사는 사찰음식으로도 유명하다. 전국 각지에서 불영사 선방을 찾아오기 때문에 손님도 항상 많았다. 선방 수행자들에게는 특별히 소화가 편한 음식을, 노스님들을 위해서는 부드럽고 씹기 편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 먹는 사람을 생각해 재료는 물론 조리법까지 달리하는 공양간의 모습에서 그는 ‘음식에 담긴 배려’를 배웠다.
“불영사는 대중생활을 하는 곳이라 공양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밥을 먹을 수 없어요. 이 먼 절을 찾아오느라 지쳤을 텐데 끼니까지 거르게 되면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저희 스님과 차담을 할 때 요깃거리를 내 드리기 시작했어요.”
봄에는 꽃잎을 따서 화전을 부쳤고, 그때그때 나는 채소들을 넣어 만두나 춘권을 만들기도 했다. 쑥, 민들레, 홑잎, 생강나무잎, 으름잎 등 산과 들에서 구한 나물과 잎으로 차도 직접 덖었다. 품이 많이 들어가는 그의 정성스러운 다과상은 곧 입소문이 났다.
남보다 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고 한다. ‘맛있다’는 한 마디면 피곤함이 사라졌다. 그냥 지나치던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가 훌륭한 식재료가 되는 것에 감탄하며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어가던 어느 날, ‘사찰음식 전문 지도자 교육과정에 지원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제철에, 내 주변에서 나는 것이 내 몸에 가장 잘 맞아
“2016년이었던 것 같아요, 종단에서 처음으로 만든 과정이라고,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서류를 넣었는데 합격했어요. 7개월간의 과정을 마치고 강사로 나서게 되었지요. 이후 사찰음식체험관, 향적세계에서 강의를 맡았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소림사에 있을 때는 사찰에서 하는 문화체험이라고 해서, 장 담그기, 김장 담기도 자주 했어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제철 재료’다.
“12년 전, 큰 수술을 하고 난 뒤 섭생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는 그는 “제철에, 내 주변에서 나는 것이 내 몸에는 가장 맞는다.”고 한다.
제철 재료는 가장 신선할 때 먹을 수 있어 좋고, 또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너무 많을 때는 말리거나 장아찌로 만들면 좋다.
“지금 봄나물은 추운 겨울을 견디고 나온 것들이라 그만큼 기운이 왕성해요. 볕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노곤해지는 이런 시기에 제격이죠.
씀바귀, 고들빼기, 쑥, 민들레 같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쓴맛이 나는데, 이게 약성이에요. 봄나물을 잘 먹고 기운을 돋우어야 여름을 잘 날 수 있습니다.”
사찰음식과 전통 장의 우수함 더 널리 알리고 싶어
이런 재료들을 맛있게, 건강하게 먹기 위해서는 양념장이 중요하다.
식습관이 서구식으로 바뀜에 따라 전통간장, 된장, 고추장이 점점 홀대받는 현실이 안타까운 그는 강의 때마다 전통 발효식품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수강생들에게 ‘건강을 생각해서 사찰음식을 배우러 왔다면, 집에 있는 양념을 먼저 살펴보라’고 해요. 사찰음식은 간장, 된장이 기본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업 내용과 상관없이 장에 관한 잔소리를 많이 해요.”
극락사 앞마당 항아리에는 장 항아리들이 즐비하다. 그는 해마다 콩을 한 가마니씩 사서 메주를 빚는다. 짚으로 엮어 처마에 매달아 50일쯤 두었다가 곰팡이가 잘 피면 갈라서 장을 담근다. 항아리 맨 아래는 면보에 싼 엿기름을 넣는다. 짠맛이 덜한 대신 은은한 단맛이 도는 ‘여거 스님’표 간장의 비결이다.
현대인들의 입맛이 달라지면서 사찰음식도 조금씩 변화하는 현실에서, 그는 “기본에 충실하되, 대중화를 위해서는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보기 좋게 담아 내는 ‘플레이팅’에도 신경을 쓴다.
“보기 좋은 떡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건강한 음식이 더 많이,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렵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보다 간단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그것이 사찰음식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제게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