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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2012. 13:27 조병철 (202.♡.85.222)
원예 칼럼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연의 이용자로 태어났을까?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카슨 (Rachel Carson, 1907∼1964)의 견해로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은 오직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기술 산업사회에서 자연은 그저 이용자의 것이 되고 있는 듯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먼저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사용하려든다. 그러면 에코투어리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자연은 우리의 피부만큼이나 아주 민감하다. 우리가 주말에 행하는 등산 캠핑 레포츠 같은 야외활동으로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아니 자연은 심하게 몸살을 앓기도 한다. 우리의 야외활동이 지속 가능한 생활이 되면서 다음 세대의 생활터전을 지키려면 어떤 야외활동의 윤리가 필요할까?
우리는 야외활동에서 야생 동·식물의 사용자가 아닌 공간의 공동 이용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우리 선조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런 정신을 지키면서 살아 왔다. 현재 세계 70억 인구시대의 편리한 우리 생활에서는 이 정신이 자꾸 희미해진다. 또한 지구에서 지금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야생 동·식물의 생존 없이는 우리 생활의 안전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현재의 생활을 위하여 그들을 남획한다. 인류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생활터전은 누가 지켜 주겠는가?
등산 중에 탐스러운 야생화를 발견했을 때 누구나 한 번 쯤은 집 뒤뜰에 가져다 심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기쁨은 다음 발견자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야생화는 우리 뒤뜰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 할 수 없다. 그대로 거기에 놓아두고 함께 감상해야 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자연 생태를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다. 자연 생태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도 해마다 똑같이 우리에게 다가 오지는 않는다. 올 여름은 비가 많았으며 보다 차갑게 다가 왔다. 지난해 여름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와이타커리 산에는 카우리 나무가 점점 죽어가는 병이 번지고 있다. 등산객에게 카우리 나무에 접근을 자재하면서 등산화 소독을 강요한다. 이렇듯 우리가 주변 생태를 이해하는 만큼 더 친숙해 진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에게는 이런 시간적 여유가 쉬어보이질 않는다. 전문가 안내로 진행되는 에코투어리즘은 새로운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리 해변 백사장이 넓고 자연 초지가 광활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야외활동으로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발자국을 만드는 것 보다는 한발 멀리 안전한 곳에서 자연을 감상하는 것도 우리 환경에 부담을 줄이는 일이다. 하물며 우리의 야외 활동 쓰레기 처리야. 우리가 야외에 나갔던 흔적을 없애고 돌아오라는 주문이다. 우리는 한때 늘어난 등산객 쓰레기로 산야를 뒤덮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은 다른 사람이 곧바로 따라하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는 어렵지 않게 형성된다.
기후변화와 더불어 산불의 위험은 우리 곁으로 점점 다가온다. 이웃나라 호주의 산불은 목장을 불태우고, 미국의 산불은 생활터전을 앗아간다. 우리의 야외 활동에서 다루는 캠프파이어의 불씨는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 매스컴을 통하여만 볼 수 있는 산 너머 불구경이 아니다.
에코투어리즘의 정신은 아주 간결하다. 우리는 현재 이곳에 자연의 일부로 잠시 머물고 있으니 이 과정에서 생기는 흔적을 최소화 하자는 제안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흔적은 모두 후손의 생활에 부담으로 전가된다. 이 터전은 우리의 후손과 다시 그들의 후손에 의해서 가꾸어 진다. 이런 생활 전통이 후세로 이어질 때 우리는 당당한 우주의 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