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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6/2011. 08:51 NZ코리아포스트 (122.♡.159.124)
왕하지의 볼멘소리
딸이 피아노를 치자 앞뜰 푸리리나무에 비둘기들이 몇 마리 날아들었다. 빨간 열매 때문에 싸움질을 하던 비둘기들이 피아노 소리 때문인지 평화스럽게 앉아 있었다. 우리 집 라운지에는 피아노가 하나 있는데 딸이 피아노를 치고 싶어 이곳에서 공짜로 얻은 것이다. 조율도 안 되고 오래된 고물피아노이지만 딸이 워낙 피아노를 잘 치기 때문에 피아노소리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한국에서는 딸이 치던 좋은 피아노가 있었다.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이 한국에서 장애인 소녀에게 주고 온 우리 피아노, 그 애는 피아노 잘 치고 있겠지?”
“피아노? 우리 피아노 내가 누구 줬지? 생각이 안 나는데...”
정말 열심히도 일을 했던 젊은 시절, P라는 사람으로부터 받을 돈이 있었다. 공증까지 받았지만 P는 번번이 약속을 어겼다. P의 상황을 파악하다가 P가 받을 돈이 있는 것을 찾아냈고 그것을 압류하려했으나 P는 자기 신용문제이니 한번만 봐 달라고 사정하며 받는 대로 돈을 갚겠다고 각서를 써주었다. 그러나 P는 그 돈을 받은 후 한 푼도 안 갚고 잠수 해버렸다.
나는 가깝게 지내는 신문사 선배를 찾아가 상의를 하였다.
“그 사람이 가진 것도 없다면 인간성을 봐야하는데... 우선 그 사람 가정을 파악해보게나,”
선배가 말하기를 비록 월세 방을 살아도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면 돈을 갚을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하였다. 그 후 나는 사설탐정처럼 P를 추적하며 조사해보니 그는 혼자 살고 있었고 부인과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친정집에 살고 있었다. 아... 돈 받기는 글렀구나. 한두 푼도 아니고...
아내가 피아노를 잘치고 아이들도 곧 유치원에 들어가니 여유가 생기는 대로 피아노를 사려했었다. 그러던 중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수소문해서 P를 만났다. 나는 P에게 피아노를 할부로 사서 피아노로 내 돈을 갚으면 좋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더니 P는 씨~익 웃으면서 오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피아노 가게로 갔고 피아노를 우리 집으로 배달시켰다. P는 할부로 갚게 되어 너무 좋다며 더 살 물건이 없냐고 물었다. 어차피 돈 받기는 글렀으니 커다란 전축과 전자레인지를 우리 집으로 또 배달시켰다. 그 당시 전자레인지는 엄청나게 컸으며 값도 꽤 비쌌다.
거실에서 아내가 드레스를 입고 비둘기처럼 푸드득거리며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당신 꼭 TV에 나오는 피아니스트 같은데... ‘가고파’ 한번 쳐봐. 내가 노래 부르게...”
그 당시 내 18번은 ‘가고파’였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어서였던지...
상도동에 대추나무가 있는 마당이 넓은 집도 샀겠다, 피아노에다 음향이 너무 좋은 전축, 게다가 통닭도 구워 먹을 수 있다는 전자레인지도 있지, 갖출 것 다 갖추었는데 뭔지 모르게 불안한 생각이 들었고 씨~익 웃는 P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차피 떼어 먹을 건데 많이 사, 뭐 이런 표정 같았다. 정말... P가 할부금을 안내서 몽땅 도로 가져가는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몇 달 후 퇴근하는데 집 앞에 트럭이 한 대 있었다. 아이들이 훌쩍 거리며 달려왔다.
“아빠~ 피아노 도둑 왔어~ 저 아저씨들이 우리 피아노 훔쳐가~”
사람들이 피아노를 옮기고 있었고 아이들은 징징 우는데 아내는 멀건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 쯧쯔, 대응방법을 두 차례나 교육시켰건만...
“아니, 아저씨들~ 시방 뭐하시는 거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피아노가게에서 만났던 사람이 지금까지 돈 한 푼 안 받았으니 피아노를 도로 가져간다고 큰소리를 쳤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나는 P에게 받아놓은 영수증을 가져와 들이대며 말했다.
“당신들 지금 절도 짓 하는 거요~ 내가 경찰서로 전화해요? 당장 도둑 잡아가라고~”
피아노를 꺼내오던 사람들이 도로 거실에 갖다놓았고 그는 나에게 사정하였다.
“제발 그 사람 좀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 도대체 얼굴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
그래, 나도 양심이 있지... 나는 또 탐정이 되어 수소문해서 P를 만났고 미리 잠복시켜 놓았던 피아노가게 사람들에게 인계해 주었다.
뉴질랜드로 오기 전,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피아노 이야기를 하였다,
“여보, 뉴질랜드에 피아노 가져가려면 비용만 많이 들어가니까, 그냥 누구주자고 응?”
“아니, 저 피아노가 어떤 피아노인데, 누굴 줘?”
아내가 돌봐주는 가난한 집의 장애인 소녀가 피아노를 좋아하는데 피아노가 없어 연습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장애인 소녀... 그래, 나는 피아노를 주라고 말하면서 뭔지 모를 서운한 마음과 함께 젊은 시절 격정적이었던 한토막이 머릿속에서 푸드득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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