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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11. 09:38 NZ코리아포스트 (202.♡.85.222)
왕하지의 볼멘소리
감기기운이 돌아다닐 때면 미리 약을 먹든가 조심을 하여 몇 년 동안 무사히 잘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주 딱 걸려들고 말았다. 거의 초죽음이 됐으니 감기가 이렇게 아프리라곤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손가락 발가락 마디마디 뼛속까지 쑤시고 아프고... 두꺼운 추리닝을 입고 이불 2개를 덥고 뜨거운 전기장판 위에 누워 있어도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그렇게 몇날 며칠 동안 꽁꽁 얼어붙은 바닷물 속에 갇혀 있었다.
내 몸은 아파 죽겠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음식을 잔뜩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신이라는 것이다. 웬만큼 아파도 먹을 건 꼬박 챙겨먹는데 이번은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입에서 들여보내주질 않았다.
“어멈도 많이 먹어~ 오늘이 어멈 생일이니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생일과 아내의 생일은 같은 날짜다. 나와 결혼한 후 아내는 자신의 생일날에 어머니 생신 음식만 준비하며 살아왔다. 우리 집안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났으니 음식 만들고 일하는 것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뉴질랜드로 온 후 몇 년간은 아이들이 엄마 생일상을 차려주어 아내는 호젓한 생일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뉴질랜드로 오시는 바람에 아내의 생일은 또 다시 묻혀버린 것이다.
생일날인데도 일만하는 아내가 너무 가여워 나는 근사한 선물을 준비했다가 주곤 하였다. 한국에서야 출장도 다니고 자주 돌아다니니 선물을 준비하기가 수월했지만 왕가레이 시골에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외국에 다녀오다가 공항에서 아내의 시계와 목걸이를 사왔다.
아내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면서 단단히 주위를 주었다.
“이거 비싼 거니까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아내는 시간관념이 희박한데다 시계마저 자주 잃어버려 시계를 안차고 다닐 때가 많아 끼니때가 되도 밥 얻어먹기가 힘들 때가 많았다. 정확하게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내 뱃속에서는 사발시계가 꼬르륵 꼬르륵 하고 울리는데 밥 줄 아내는 보이지 않으니...
“시계차고 다니면서 끼니때가 되면 잽싸게 와서 밥 좀 챙겨 주라고...”
며칠 후 내 뱃속에서 사발시계가 꼬르륵 꼬르륵 울리고 있는데 밥줄 아내는 소식이 없어 집 안팎으로 찾아 나섰다.
“여보~ 밥 안주고 뭐해~ 아니, 당신 손목에 왜 시계가 없어?”
“저기 풀밭에다 시계를 떨어뜨렸는데...”
아내의 이야기가 풀밭에 가시풀이 보여 삽을 가지고 들어가 가시풀을 자르고 나왔는데 손목에 시계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서 가시풀을 잘랐어? 내가 시계 찾아올게,”
그런데 아내는 가시풀이 보이는 대로 이리저리 풀밭을 헤맸기 때문에 어디로 들어갔다가 어디로 나왔는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시계를 찾으려고 풀밭을 온종일 뒤졌는데 이미 소들이 지나다녔고 아내가 워낙 광범위하게 싸돌아다녀 결국 못 찾고 말았다. 아이고, 그 비싼 시계를 한 달도 못 차고 또 잃어버리다니...
그 해 아내의 생일날 나는 사 놓았던 목걸이를 선물 하였다.
“어머, 여보 언제 목걸이를 준비했어, 너무 예쁘다. 다음에 차게 당신이 잘 좀 보관해줘,”
그 후 어머니가 한국에서 오셨고 또 아내는 생일날 음식준비 하느라고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어머니 생신을 위해 고생을 하는데 선물이라도 줘야 하는데 준비를 못했으니... 괜히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서랍을 뒤져보다가 목걸이 케이스를 발견하였다. 야, 이거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잖아, 다시 선물로 줘도 되겠어. 나는 예쁜 종이로 포장하면서 아내가 전에 받았던 기억을 못하기만 바랬다.
“어머 목걸이가 너무 예쁘네, 당신 언제 준비했어? 다음에 차게 당신이 잘 좀 보관해줘,”
아내는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나쁜 것이 이렇게 좋을 때도 있을 줄이야...
내가 아픈지가 얼마나 됐냐고 쉰 목소리로 아내에게 물었더니 3주째라고 한다. 요즘은 얼마나 기침을 많이 했는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우니 갈등이 생겼다. 받은 기억을 못하는 마술목걸이를 또 한 번 선물로 줄까 말까? 아직도 새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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