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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모순성, 그 위대함과 비참함을 독특한 문체로 표출한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팡세(Pensees)’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성(魔性)과 미모(美貌)를 갖춘 여성은 예로부터 예술 창작의 소재로 회자되었으며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으로 등장하여왔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 69-30)도 빼 놓을 수 없는 그중의 한 인물이리라. 수많은 클레오파트라 영화중 초기 대표작인 클로레트 콜버트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34년 발표)는 미모로 로마의 통치자 들을 홀리는 캐릭터로 그녀를 묘사했다. 반면 우리에게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영화,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클레오파트라’(1963년 발표)는 단순한 미모만을 부각시키지 않고 상당한 정치력과 결단력을 갖춘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진전된 해석과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완숙한 미모가 결합되어 클레오파트라의 신화를 더욱 증폭했다고 평가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가 세계제국으로 일어서던 기원전 51년-30년 사이에 이집트의 여왕이었다. 로마의 통치자들과 연대를 맺으며 자신의 권력과 왕국을 지키다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왕국도 쇠망하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가 사망한 후에 이집트로 건너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의 마지막 여왕으로 39년 생애 중 21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녀가 속설처럼 남자를 뇌쇄(惱殺)시키는 곤혹스런 여인이라거나 큰 매부리코에 뚱뚱하고 못 생겼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지성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실력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크스 안토니우스 등과 관계를 맺고, 정치적 연대를 한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만 아니라 그녀의 지성과 수완 때문일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의 산물로 성립되었다. 알렉산더의 대제국은 그의 사후 각 지역을 관할하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집트 지역에서 성립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 후손의 한 갈래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이며 클레오파트라는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하던 이집트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융성하고 번영한 나라로 서방과 동방의 문화를 융합해 발전을 거듭했다. 이러한 배경은 클레오파트라가 신흥 군사강국인 로마의 실력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바탕이 되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상태여서 당시 문명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주변의 지중해 세계를 이해하는 정치적 동맹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굉장히 똑똑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열정이 넘쳐나서 어렸을 때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왕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10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수학, 철학, 천문학에도 능한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엘리트였던 것이다. 대화술도 뛰어나 그녀와 깊이 얘기를 나눠본 사람은 누구나 반할 정도였다. 17세에 부왕이 사망한 후 왕조의 전통에 따라 남동생과 결혼해 공동 파라오(Pharaoh, 고대 이집트 왕의 칭호)가 되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있었고, 이 와중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왕권에서 밀려나 이집트 밖으로 추방당하나 다시 왕권을 되찾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BC47년,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도망 온 정적 폼페이우스를 찾아 이집트로 오게 되는데 이 기회를 놓칠 클레오파트라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몰래 이집트로 잠입한 클레오파트라는 부하를 시켜 카펫으로 자기를 둘둘 말아 상인으로 위장하고, 둘둘만 카펫을 카이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선물로 전하도록 한다. 카이사르가 그 카펫을 펼치자 그 안에서 반나체의 여왕이 요염한 자세로 나타난다. 당시 전쟁의 영웅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52세의 카이사르이지만 21세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만다. 카이사르는 그녀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다시 왕좌에 앉히게 된 것이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았음은 물론 피맺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둘은 연인이 되어 아들을 출산했고 BC46년, 그녀는 아들과 또 다른 남동생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로 오게 된다. 하지만 BC 44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자 이집트로 돌아간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 공동 파라오가 되어 즉위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카이사르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 부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3두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BC41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와의 극적인 첫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적대관계에 있었고 당시 동방 원정 책임자였던 안토니우스는 정적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제휴가 필요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만날 때 황금색 배를 타고 화려하게 등장한다. 배에는 황금색 비단으로 치장한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 사랑의 비너스 모습을 한 클레오파트라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이제 28살이 된 클레오파트라는 우아함과 성숙미로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42세의 안토니우스는 완전히 매혹당하고 만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한 유부남이었지만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으로 둘 사이에 자녀 셋을 두며 10여년을 같이 살았다. 또한 오리엔트 지방의 정치권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주게 된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경만 하고 있을 로마 시민들과 옥타비아누스가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한판 대결을 벌리게 되는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31년 악티움해전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게 된다.
BC 30년 8월1일, 안토니우스는 자결로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이어서 클레오파트라도 11일 후 뱀에 물려 죽는 자살을 감행하고 만다. 이로써 로마의 영웅들을 사로잡아서 이집트를 지키려했던 마성을 지닌 미녀 클레오파트라의 역할은 끝났고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