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보다 수만 년이나 앞서 신대륙을 찾아낸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터전을 일구는 모습은 이후 같은 땅을 찾은 유럽인들이 보여준 그것과는 여실히 다른 것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베링해를 건너 북미로, 걷고 걸어 중미와 남미 끝자락까지 닿은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과 하나로 여겼다. 자신들을 받아들여 준 자연과 완전한 일체감을 이루는 것으로 한 생명이 다른 존재에 전할 수 있는 최상의 존중과 감사를 표한 것이었다.
그들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숲과 바람, 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걷고 걸으며 길에서 지혜를 구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전해진 사실이다. 쇠락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는 이제 슬픈 전설로 남았지만, 그들이 걸으며 행복을 얻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건재하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땅과 마주하는 이들에게 길은 선물처럼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폐사지(廢寺址)에 가본 적 있어요? 이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곳이지요. 절이지만 절이 아닌 그 공간이 저는 참 좋았어요.”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아침, 불현듯 떠나게 된 산사 여행에 앞서 홍수영 씨는 오래 전 폐사지를 찾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국내 유수의 건축사 사무소에서 기획자로 활동하며 건축, 인문, 문화, 예술 전반의 영역을 한데 모아 대중들과 소통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그에게 옛 절터란 땅에 새겨진 또 다른 아름다움의 영역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산책전문가’로서 많은 이들과 걷기의 행복을 나누고자 하는 그녀에게 새로운 길은 언제나 반가운 선물이다. 오늘 홍수영 씨는 도심 속의 천년고찰, 서울시 강북구에 위치한 화계사로 템플스테이를 떠났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서울의 면면을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웃음). 그간 몰랐던 경험을 하게 되어 정말 설렙니다.”
간밤에 짐을 몇 번이나 싸고 풀며 여행을 준비했다는 홍수영 씨. 환하게 웃으며 산문을 들어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일순 가득했던 도시의 소음은 사라지고, 수령을 알 수 없는 장대한 나무 한 그루가 이방인을 반겼다. 홍수영 씨의 한 걸음이 경계를 넘는 순간,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숲의 문을 두드리는 시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화계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이신 혜량 스님의 환한 웃음과 낭랑한 음성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날씨가 화창하니 화계사 숲길을 걸은 후 도량을 둘러보자.’는 제안에 홍수영 씨는 미소로 반색을 표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은 숲의 멋진 향기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에 앞서 스님은 숲을 향해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함을 상기시켰다.
“자, 먼저 눈을 감아 보세요. 그리고 마음으로 허락을 구해보세요. 숲이 나에게 허락을 해줄 때는 좋은 냄새와 소리가 나거나, 느낌들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거절할 때도 있어요. 그 느낌은 오직 스스로 알지요. 마음이 불편하거나, 또 어디선가 벌이 날아와 무섭게 앵앵거리며 신호를 주기도 합니다. 그럴 땐 조금 더 마음을 내려 놓으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한 번 더 허락을 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숲은 우리의 방문을 허락해 줍니다.”
모든 생명에겐 자신의 영역이 있음을, 그리고 그 영역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잊지 말아야 함을 세상 가장 자비로운 존재, 자연 앞에서 다시 새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향수의 기본 향은 흙냄새라고 해요. 썩은 나무에서 자라는 이끼 냄새, 나뭇가지, 꽃잎까지 우리는 자연의 향에 끌립니다. 이곳에는 쓰레기가 없어요. 자연은 스스로 순환 중이니까요. 우리는 그 생명의 향기로 치유되는 것이니 숲에 허락을 구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요.”
“집 근처 인왕산에 자주 오르는데 숲의 허락을 구해본 적은 없었네요. 다음부턴 꼭 인사를 해보겠습니다.”
스님 뒤를 따라 걷던 수영 씨는 내내 숲의 향을 맡고, 나무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허락해 준 숲과 교감을 나누었다.
나라는 존재의 행복
화계사는 한국 근대불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고려 광종 때 창건된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와 한글 학자들의 거점이 되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연구된 현장으로, 또 전 세계에 ‘살아있는 부처’로 평가받기도 한 숭산 스님의 거처로서 해외 포교의 상징이 된 사찰이다. 각각 보물로 지정된 화계사 동종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상,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들까지 눈 닿는 곳, 발 닿는 곳마다 역사적 의미와 유산이 가득하다. 혜량 스님의 시원시원한 설명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화계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륵전에 다다랐다.
“미륵불은 미래에 오신다는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묶여있다는 것을 깨달은 분이지요. 재물, 사랑, 건강 무엇이든 내가 묶여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레오처럼요 (웃음).”
화계사 미륵전의 특징은 석벽을 둘러싼 다양한 국가의 불상들에서 찾을 수 있다.
“색도 모양도 다른 저 불상들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지요. 그러니 ‘나는 있는 그대로 괜찮다!’ 하고 인정해주세요.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유로워집니다.”
두 사람은 미륵전 앞 계단에서 잠시 해바라기를 하며 ‘알아차림’의 시간을 가졌다.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시간, 스님은 홍수영 씨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며 ‘정말 좋은 것은 값을 매길 수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스님에게 답장을 보내듯 “스님 얼굴이 반짝반짝 빛이 나요.”라며 홍수영 씨는 미소지었다.
찬바람 속에 도량을 거니느라 몸이 언 수영 씨에게 스님은 한 번 더 특별한 선물을 전했다. 스님만의 향기 명상이었다. 은은한 향이 감도는 따뜻한 선방에 노곤해진 몸을 뉘자 아름다운 기원의 목소리가 마음을 덮었다.
“내 이름을 가진 이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 이름을 가진이가 평안하기를,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일출부터 비밀의 정원까지
다음 날, 검푸른 새벽하늘에 손톱달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침 공양을 마친 혜량 스님과 홍수영 씨는 동 트기전 바삐 산행에 올랐다. 쉼 없이 흐르는 계곡 물소리, 일찍 눈을 뜬 새들의 노래와 맑은 공기, 그리고 두 사람을 따르는 손톱달까지 모두 반짝이며 겨울 숲의 청명함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문득 뒤돌아본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다다른 찰나 저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불쑥 붉은 해가 솟았다! 거대한 운무처럼 펼쳐진 서울의 전경과 일출을 바라보며 수영 씨의 얼굴에 연신 웃음이 떠 올랐다.
“오랜만에 일출을 본 것 같아요. 이런 것을 두고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거겠지요?”
해맞이로 양껏 기운을 채운 두 사람은 산 아래로 내려와 다시 한번 특별한 공간을 찾았다. 바로 화계사 도량과 산자락 사이 작게 자리한 숲속 공터이다. 새들과 작은 고양이, 그리고 스님만이 찾는 비밀의 정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양발을 꽁꽁 싸맸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고스란히 땅과 마주했다. 어싱(earthing), 이른바 접지(接地)라고 하는 맨발 걷기이다.
“어릴 적 순수한 의식으로 걸어보세요. 왼발, 오른발의 발가락까지 단단히 땅과 맞닿아 보는 거예요.” “스님, 이렇게 맨발로 걸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무척 상쾌해요!”
쌓인 낙엽의 푹신함, 이끼 덮인 흙의 부드러움, 잘 마른 잎을 밟을 때의 바삭거림이 오감을 채우는 시간. 평범한 일상이 한 순간 유년시절로 변하는 마법이 비밀의 정원에서 펼쳐졌다.
또 다시 출발의 시간
이윽고 스님은 ‘화계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며 홍수영 씨를 선방(禪房)으로 안내했다. 수영 씨는 형언할 수 없이 따뜻하고 평온한 기운이 가득한 선방에서 벅찬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스님들이 좌선하신다는 작은 방에서 그녀는 오래 발을 떼지 못했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오래도록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어요.”
지난밤, 묵혀 두었던 고민이 고개를 드는 통에 잠을 설쳤다는 그녀에게 스님의 따뜻한 당부가 전해졌다.
“불안은 축복입니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내 안의 힘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빛과 어둠이 하나인 것처럼, 평안한 마음이 존재하기에 불안함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참나’를 알아차리고, 반대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면 마음은 금세 편안해질 겁니다.”
겨울의 도심과 산, 사찰의 구석구석과 작은 숲길까지 내내 걷고 호흡했던 1박 2일의 여행에서 지칠 법도 하건만 홍수영 씨의 목소리와 눈빛에 생기가 가득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 하지만 당당한 산책전문가를 꿈꾸는 그녀에게 길은 다시 이어질 뿐이다.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던 산책연구소의 문을 꼭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 이렇게 좋은 길이 있으니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수입은 썩 좋지 않겠지만요(웃음).”
구석구석 살아있는 아름답고 좋은 길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옛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랬듯 돌고 돌아 길은 끝내 행복과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주 먼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신비한 힘, 산책으로 부자가 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좋은 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