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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시간들을 거의 마치고 느긋하게 쉬고있는 어느 저녁 나절이었다. 늘상 딸처럼 살가운 ㅇㅇ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 같이 하자는 전갈이었다. 오클랜드가 아닌 외곽 도시에 살며 잠시 다니러 온 여인이었다.
바쁜 삶 중에 시간을 쪼개어 왔을 젊은이가 늙은 친구(?)까지 챙기겠다니 반갑고 대견했다.
큰 댁 주방이 마치 제 자리인양 음식 장만하느라 정신없는 그녀와 기분좋은 만남을 했다. 2년만의 해후였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집은 늘 그렇듯이 먼저 집 구경부터 시작되었다.
주방에서 뒤쪽 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거칠것 없는 바람이 달려들었다. 시야를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운동장? 같이 넓은 데크가 또한 시원했다. 새파란 허공에 펼쳐진 흰구름이 한가로이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갇혀살기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려 속까지 시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저만치 매끄럽게 진회색 무언가가 길게 깔려 있는데 그게 무얼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물이 꽉 차 있을 때의 멋진 경관을 자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했다. 아하 그리고보니 바닷물이 들고나는 물길이었구나.
밑바닥 맨살은 저토록 황량하다니... 왠지 조금은 아쉬웠다.
바다속엔 화려한 용궁이 있고 인어공주가 살고있다는 아름다운 신화를 아이처럼 잃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집 안에서 가까이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다는건 참 재미있을 것 같았다.
소리치면 들릴것 같은 물건너 저편, 언덕바지에 드문드문 걸쳐진 작은 배들은 언제 어디로 출항을 하는지?
부질없는 상념에 빠져있을 동안 넓게 비치 파라솔이 펼쳐진 긴 테이블엔 음식상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있었다.
불판위에선 벌써 두툼한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배춧잎 만큼이나 큼직한 시골 상추가 어서 반겨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목구비 깔끔하게 잘 생긴 오늘의 주빈인 젊은 청년이 손님답잖게 음식접시를 나르느라 분주했다.
예비 백년손님이 청바지 티셔츠의 가벼운 차림으로 늘상 대하던 사람 같았다. 여자친구 어머니께 처음으로 인사하러 온 사람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예쁜 엄마를 닮은 아가씨와 한쌍의 비둘기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여친의 어머니도 역시 부담없이 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여기 문화에 벌써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이민 2세대인 코리안의 딸과 제 3국의 청년의 만남이 전혀 이상하거나 낯설지도 않았다.
이 집의 주인 어머님은 내 친구분이셨다. 몇년 연상의 어른이라 형님 아우 호칭하며 가깝게 지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찌기 세상을 뜨셨다. 벌써 20년이 지났다니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이 나라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된 분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추억도 있어 더욱 잊을수가 없다.
그 때는 한국 식품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민 초기였다.
무슨 크고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형님은 쫄깃하고 맛있는 찰떡을 손수 만들어 들고나와 나누어 주었다.
고국에서나 맛볼수 있는 우리 고유의 음식 떡. 외국에 나와서 먹으니 감동이었다. 그 분의 인기가 대단했던건 물론이었다.
나중에는 얻어먹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농 반 진 반처럼 떡 강의를 하라고 졸랐다.
어느 날이었다. 큼지막한 스테인레스 함지에 재료와 얼레미 체까지 준비해 담아가지고 오셨다. 말로만 전해주는 줄 알았던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완벽하게 할 수 있도록 처음 과정부터 아예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맨처음 궁금했던 것은 방앗간도 없는 이 곳에서 떡가루를 어찌 만드느냐는 문제였다.
봉지에 담긴 하얀 가루를 함지에 쏟았다. 건식 가루라면 밀가루밖에 써 본적이 없는 우리들이였다.
방앗간에서 편하게 해 먹던 떡을 손수 만들어 먹는다는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마치 6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었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잖은가, 이국에서 아무때나 해 먹을수 있다는게 너무나 좋았다. 가루를 구입하는 장소의 정보까지...
일찌기 스스로 터득했을 그 형님의 현명함에 놀라며 열심히 배웠다.
한국 식품점에 가면 온갖 떡들을 고루 사 먹을수 있는 요즘,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누군가 고국에서 라면 박스 들고오면 하나 얻어먹으려고 눈치보며 기웃거리던 때 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골프치러 다닐때 내 점심은 항상 쫄깃쫄깃한 찰떡이었다.
어느 젊은이가 가르쳐 달라기에 설명으로 알려준 적이 있었다. 한참 지나서 문득 생각나기에 물었더니 웬걸 망쳐서 못먹었단다. 확실하게 가르쳐주려고 직접 들고온 형님의 속뜻과 정성을 알 것 같았다.
같이 배웠던 C여사는 고국 들어갈 때마다 찹쌀가루를 한 박스씩 사 들고 갔다. 이웃 친구들에게 뉴질랜드 갖다온 인사를 그렇게 익힌 떡 솜씨로 자랑을 하면 모두가 놀란다는 거였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기회가 되면 아드님에게 어머님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누구보다 자상하게 어머님을 모셨던 특별한 효자 아들. 형님은 은근한 말투로 아들 자랑을 곧잘 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동 어머님 침대곁에서 안타깝게 임종을 지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님 장례를 마치고 친구분들을 모셔 점심대접을 한 사람도 그 아드님뿐 이기에 잊어지지가 않는다.
어느새 바알갛게 고운 얼룩으로 가득찬 하늘이 눈앞에 있었다. 해가 서산마루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데크 끝에서 손에 잡힐듯 너무도 가까이 와있는 하늘.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데 낮보다 한층 더 아름다웠다.
기다렸다는 듯 코너에 놓여있는 화로에 불을 붙인다고 법석들이었다. 이 더위에 무슨 화로불?... 의아했다.
기린처럼 목이 길고 몸체가 둥글게 잘 생긴 화로였다. 처음 보는 무쇠화로가 무슨 예술작품 같아서 멋도 있었다.
드디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어른들이 아이처럼 좋아라 손뼉치며 환호했다.
그거였다 불놀이, 대지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은 여름 한복판에서도 불놀이를 하는구나, 그것도 어른들이 . . . .
곁에서는 조금도 화기를 느끼지 못하니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화덕임을 알게되었다. 위로만 올라가는 불꽃, 검은 장막앞에서 빠알갛게 이글거리며 춤을 추다가 가끔씩 별똥같은 꽃가루를 날리기도 한다. 데크가 넓고 하늘이 마냥 보이는 이 집에선 딱 어울리는 불놀이였다.
어머니 세상 뜨실무렵 새파랗게 청년같던 젊은이가 이제 손자를 본 할아버지가 되었다. 모두를 떠나보내고 빈 둥지에 남은 사람이 모처럼 객식구들을 맞이해서 아이처럼 신 이 난것 같은 햇노인. 조금은 안쓰러웠다.
먼 길 와서 음식준비에 바빴던 젊은 엄마는 피곤했는지 모기에 뜯긴다는 핑계로 안으로 들어갔다. 새파란 청춘의 커플은 바짝 붙어앉아 미래를 설계하는지 소곤소곤 정답다. 저 불꽃처럼 열정으로 살아가자고 다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삼겹살에 걸친 와인 한잔의 반란일까? 내 입에선 꼭 꼭 봉하고 살았던 한달치 수다가 줄줄이 잘도 이어졌다. 노인 그룹에 입문한 신참 할아버지와 그럭저럭 교감이 되는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어머니 투정처럼 잘도 받아주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형님의 별 일까? 옛 친구인 나와 놀아주는 아들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도 하시리라.
활활 타 오르는 불꽃. 술처럼 사람을 흥분시킨다. 가슴속 열망을 바알갛게 태워주는 멋진 충족감.
꿈속을 헤메듯 깨어나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